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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12. 2024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한다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파스타와 리소토는 꽤 맛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릇을 반쯤 비웠을 무렵 친구는 내 마음이 괜찮은지 물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느라 시간이 걸렸다. 올 가을부터 내면의 이상신호를 감지했다. 하지만 주변에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일시적인 우울감이나 피로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상담을 받고 나서야 내 안에 오래된 상처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엄마가 쓰러지면서 내 안에 있던 지지대도 함께 무너졌다.


 직접적인 원인은 없었다. 이제까지 쌓아놨던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것뿐이다. 반복되는 우울감과 공허감 속에서 허우적대다 전문가를 찾았다. 이대로 두면 안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상담전문가인 대학 동기를 만나서 상담을 받고 내 상황을 인지하게 됐다. 지금은 품고 있는 감정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이름표를 붙이는 중이다. 인정하고 정의한 다음 분류한다.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도 납득했다. 생각한 것들을 차례대로 말하면서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친구에게 털어놨다.


 말하면 안 된다고 여겼던 에피소드를 말로 표현하고 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 내면에 있는 크고 무거운 바위가 아주 조금 깎여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다. 무턱대고 조언을 하거나 자기 생각을 멋대로 늘어놓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말하고 신중하게 표현했다. 섬세하게 마음을 쓰는 태도가 참 고마웠다. 처음으로 내 삶을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다 듣고 나서 친구는 본인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25년 지기인데 친구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친구는 아버지로 인해 힘든 시절을 겪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덮어놓고 살았고 친구는 상관없다고 여기고 살았다. 우리는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었다. 모양이 닮은 오래된 흉터를 서로 공유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이 마음에 닿았다.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상처받은 적 있는 사람이다. 아픔을 아는 사람이 내미는 손길은 진심이 깃들어있다. 진심은 늘 진심에 닿는다. 상처가 아문 자리의 흉터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괜찮아진다고 말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동병상련은 동정이 아니라 공감이다.


 우리는 담담하게 서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더 이상 부끄럽거나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가슴이 후련해질 때까지 전부 다 비웠다. 누군가에게 말로 표현할 때마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 같은 응어리가 깎여나간다. 기분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친구는 언젠가 청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거리에서 울었다는 고백에 마음이 아팠다. 모르고 지냈던 친구의 상처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자신감과 결심이 깃든 얼굴은 밝았다.


 전부 다 받아들였다는 대답이 가슴에 와닿았다.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말해줬다. 내 손을 벗어난 일이나 지나간 것들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다. 무거운 짐처럼 떠안고 있던 불안과 걱정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맘을 추스르고 현실에 대응하면 된다는 말 역시 큰 힘이 됐다. 상처가 아물면 흉터가 남는다. 새살이 돋으면서 흉터는 점점 옅어진다. 드러내지 않고 다들 숨기고 살지만 흉터는 생존의 증거다. 고통을 이겨내고 아픔을 견뎌냈다는 승리의 상징이다.


 내면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혹독한 시련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괴롭고 외로운 시절을 지나왔으므로 고통을 호소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먼저 손을 내밀고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상처를 품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에게 괜찮다는 말을 제일 먼저 건네는 존재다. 닫힌 문을 강제로 열지 않고 천천히 문을 두드린다. 내 발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문 밖에서 기다려준다. 친구 덕에 작지만 힘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모습에서 미래의 나를 봤다. 그리고 오래 전의 내 모습도 겹쳐 보였다.


 그때는 세상이 끝날 것처럼 절망하고 슬퍼했는데 아직까지 잘 살아있다. 결국 다 지나갔다. 과거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에 맞서 아픔을 극복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아직은 수시로 외롭고 또 괴롭다. 이제 막 긴 터널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했는데 지금은 좀 낫다. 암순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삶은 단 번에 나아지지 않는다. 갑자기 나빠질 때도 있지만 괜찮다. 출구는 멀리 있지만 앞으로 가다 보면 언젠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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