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절대적이지만 기억은 상대적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의 기억은 단절되거나 분절된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정작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시간 순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뚝 끊어지는 구간이 나온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지워버린 것이다. 망각은 처절한 생존본능이다. 받아들일 수 없어서 과거의 나는 기억하는 것을 그만두고 잊는 것을 선택했다. 납득할 수 없었던 현실은 블러처리된 흐릿한 형상으로 대체됐다.
어린 시절 안 좋은 일이 떠오르면 늘 커다란 창고를 상상했다. 그 안에 나쁜 기억을 밀어 넣고 자물쇠를 채우고 두꺼운 문을 닫았다. 대학에서 기초적인 심리학을 접하게 되면서 PTSD라는 개념을 배웠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트라우마가 있다는 생각은 내게 미치지 못했다. 지나간 과거라 괜찮은 줄 알았다. 다 끝난 일이라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진다. 과거의 나는 내 안에 살아있다. 트라우마나 PTSD를 인지하려면 시간 혹은 계기가 필요하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이상신호를 감지해도 정작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트라우마를 인정할 수 없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나 일시적인 우울감이라고 착각했다. 받아들인다고 나아지거나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어서 상처를 가만히 덮어두었다.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힘들어서 지워버린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상처받은 마음은 의지나 근성으로 고칠 수 없다. 용기나 결심의 문제가 아니다. 성장기의 아픈 기억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다. 양가감정은 벗어날 수 없는 족쇄다. 내가 떠나면 가족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상처를 감추고 감정을 억누르고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냈다. 겉으로 티 내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제한된 생활반경 안에서 수시로 부침을 겪으면서 소나기 같은 세월을 맞았다. 나이가 늘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과거를 외면했다. 커다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두려웠다. 맞설 수 없어서 눈길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심리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몰입을 택했다.
활자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서에 집착했다. 책에 집중하면 쓸데없는 생각이나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책을 보느라 나안시력이 1.5에서 0.7까지 떨어졌다. 결국 안경을 쓰게 됐다. 몰입은 독서에서 음악, 영화, 미술 같은 예술 분야로 전이됐다.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라면 다 괜찮았다. 공허한 내면에 정신없이 채워 넣었다. 하지만 몰입이나 집착은 몸에 부담을 준다. 그림을 그릴 때는 끼니도 거르고 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 완성할 때까지 그리는 행위에만 집중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몰입해서 글을 쓰다 보면 체중이 금세 줄었다.
사람도 몰입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신선한 자극을 추구했다.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동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늘 공허감과 허무감을 달고 살았다. 과거의 아픔을 무거운 세월로 덮어놨지만 그 위로 올라오는 독기는 피할 수 없었다. 외면하고 도망치면서 나를 몰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창작에 집착하고 감정에 허우적대고 인연에 연연했다. 약물이나 중독에 비해 온건한 방법이지만 결국 자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파멸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자해를 일삼았다.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 만든 자학의 늪에 빠져 지냈다.
내면의 상처는 느낄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심리적인 환상통이다. 내 안에 존재하지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은 마음을 좀 먹는다. 견딜 수 없어서 신체적인 자해를 선택한 사람들을 본 적 있다. 상처를 내고 폭음을 하고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산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고통을 선택한다. 또렷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고통이 역설적이게도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진통제가 된다. 그리고 중독된다.
나는 자학에 중독된 상태로 살아왔다. 자신을 몰아세우고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 현실을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고통으로 고통을 잊는 방법은 소모적이고 제한적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나를 망가뜨리는 악습이다. 몸에 부담이 쌓이고 마음은 깎여나간다. 공허감과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려다 자학의 늪에 빠졌다. 겨우 빠져나왔지만 마음에 들러붙은 죄책감과 자괴감을 쉽게 털어낼 수 없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내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무기력하게 지냈다.
지금은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기록을 통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는 일은 힘들다. 예전에는 빨리 좋아지기만을 원했다. 상처 입은 기억을 훌훌 털고 싶었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기분이 마음의 날씨라면 성격과 기질은 계절이다. 심리상태는 기분보다 기질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이제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천천히 가기로 결심했다.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느리더라도 계속하다 보면 시도하다 보면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작은 용기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