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일이 생기면 집안을 정리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내 방으로 돌아와서 옷장을 열었다. 흐트러진 옷을 꺼내서 개고 세탁하거나 드라이 맡길 옷을 분류한다. 액세서리 함을 열어서 금속소재의 부토니에, 배지, 넥타이핀을 세정재로 닦았다. 시간이 남으면 가방이나 지갑 같은 가죽 소품에 캐럿크림을 묻혀서 관리했다. 복잡한 내면은 쉽게 수습할 수 없지만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마음만 먹으면 정리할 수 있었다. 옷정리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나만의 소박한 방법이었다.
사람은 옷을 입고 옷은 사람을 입는다. 옷은 내게 단점을 가리고 약점은 감추는 갑옷이자 가면이었다. 옷차림을 통해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을 감추는 사람도 있다. 차림새가 멀끔하면 내면의 감정이나 문제는 드러나지 않았다. 집안이 너저분해도 커튼을 치면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힘들수록 옷을 잘 입으려고 노력했다. 깔끔한 슈트를 입으면 없던 자신감이 생겼다. 캐주얼한 스타일 속에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다녔다.
힘들고 괴로우면 사람은 쉽게 흐트러진다. 옷차림에 신경 쓰면서 마음을 달랜 적도 많았다. 먹지도 씻지도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 기분을 전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헬스장을 다녀와서 깨끗한 옷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약속을 잡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옷은 그릇을 장식하는 멋진 무늬다. 우울하고 속상한 날은 옷 입기에 변주를 줬다. 경쾌한 패턴의 넥타이를 고르거나 라펠에 포인트가 되는 부토니에를 달아주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옷차림을 볼 수 있는 거리를 찾아갔다. 사람들이 붐비는 공간에 있으면 잡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압구정, 홍대, 성수를 돌아다니면서 옷이랑 사람을 구경했다. 아이쇼핑을 하면서 생활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주부들의 마음을 납득하게 됐다. 가끔씩 셔츠를 꺼내서 다림질했다. 옷감의 주름이 펴지는 것처럼 구겨진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옷은 내게 있어서 마음을 투영하는 대상이자 고통을 덜어내는 수단이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만들고 싶을 때는 셔츠를 새로 사 입었다. 연말세일기간에 구매해서 쟁여놓은 새 신발을 꺼내 신는 것도 좋았다. 상황에 맞는 옷을 갖춰 입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차림새를 완성하려면 반복 작업이 필수다. 꾸미기는 그래서 늘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열정과 애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치면 의욕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씻는 것도 번거롭고 차려입는 것도 귀찮아진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옷 입기는 권태에 저항하는 활동이다.
멋 부리기는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멋을 추구하는 행위는 귀찮음을 이겨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날에는 평소보다 더 옷 입기에 공을 들였다. 넥타이 패턴과 양말소재 같은 디테일까지 신경 썼다. 익숙한 행위를 통해서 내가 현실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거울 앞에 섰다. 외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늘 그랬듯이 다 지나갈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옷을 걸치면서 자신감도 함께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