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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20. 2024

오르막 길 아래에서

 매일 저녁 도시락을 싼다. 엄마를 간병하는 아버지께 드릴 점심 도시락이다. 반찬은 조촐하다. 멸치볶음, 동치미, 양파절임. 내일부터는 김장김치도 담아야겠다. 오늘은 하얀 쌀밥 대신에 계란볶음밥을 준비했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 만들어둔 반찬은 여전히 손맛이 들어있다. 평생 먹고 자란 익숙한 반찬냄새를 맡으면 조금 아련한 느낌이 든다. 자고 일어나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병원에 간다. 아침식사가 끝난 시간이라 가면 두 분이 늘 함께 계신다.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도시락을 전해드린다. 그리고 엄마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응급실과 집중치료실을 거쳐 재활병원으로 온 엄마는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살가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무뚝뚝한 내가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엄마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다.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을 보면 가슴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이 난다. 가족이라는 존재감을 뜨겁게 실감하는 순간이다. 내 손을 꼭 잡은 엄마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가만히 잡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다. 엄마가 만들어준 튼튼한 지지대가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높이 솟아있는 오르막길 앞에 서있다. 앞으로 얼마나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까마득하고 먼 길이다. 집에 가는 길 종종 윤종신의 <오르막길>을 듣는다. 미소를 기억해 두자는 가사가 가슴에 닿았다.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이어지겠지만 끝까지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긴다. 오르막 길 아래에서 바라보는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막연한 기대보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품기로 했다. 좋은 날은 알 수 없는 언젠가가 아니라 서로 웃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나 오랜만에 꺼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날 보고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왔다. 팔을 벌려서 누워있는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손으로 내 등을 천천히 쓸어줬다. 손길이 따듯했다. 진심은 늘 마음에 닿는다.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엄마 얼굴을 보면서 해야겠다. 힘든 시기지만 진심을 전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다. 돌아서서 아버지에게도 사랑하다는 말을 해드리고 안아드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를 산보다 높고 바위보다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아버지는 많이 줄어들었다. 내 가슴에 닿은 앙상한 아버지의 늑골이 차갑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아버지는 나에게 고생이 많다고 힘내라고 이야기했다. 일흔을 넘긴 경상도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한 집에 있어도 서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안방, 거실, 작은 방 각자의 영역에 들어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말들을 그냥 속에 담아두고 살았다. 사랑한다는 말대신 나는 맛있는 음식이나 옷을 사서 부모님께 건넸다. 쑥스러워서 익숙하지 않아서 미루기만 했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더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온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위기와 기회는 같은 말이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는 것 같다. 기회는 풀기 힘든 숙제를 동반한다.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여전히 정신없고 처음 겪는 일이라 난감할 때가 있다. 피로감을 느낄 때면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가 올까 봐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은데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 살아보려고 한다. 이제 지나간 일은 원망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들은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공허감과 불안감으로 한동안 괴로웠다. 그 시기를 간신히 버텨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중이다. 가족들을 생각한다. 혼자서 멀리 갈 수도 있지만 끝까지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낮은 산은 정상에 혼자 올라갈 수 있지만 높은 산을 등반하려면 동반자가 필요하다. 여전히 나는 우울감과 싸우고 있다. 끈끈하게 들러붙은 기분을 털어내는 것은 피로를 동반한다. 자주 지치고 갑갑하다. 하지만 우울감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엄마가 힘을 내고 있는 것처럼 나도 힘을 내서 회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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