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내린 눈은 아침 햇살을 맞고 전부 녹았다. 멋대로 내리더니 갑자기 멎었다. 감정도 똑같다. 감정은 날씨다. 수시로 변하고 때가 되면 다 지나간다. 계절처럼 시작과 끝을 알아차리기 힘들 때가 많다. 예년보다 빨리 찾아오기도 하고 평년보다 늦게까지 이어질 때도 있다.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길었다. 10월 초까지 한낮에 반팔을 입고 다녔다. 20대 시절의 나는 마음이 힘들 때면 김범수가 부른 <지나간다> 나 김장훈의 <소나기>를 들었다. 소나기 같이 퍼붓는 막막한 감정도 결국 다 지나간다.
하지만 머리로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주 자책했다. 내가 초라해 보이고 못나보였다. 남들에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나를 탓하느라 마음이 괴로웠다. 가까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거나 감정을 내비치지 못한 채로 고립된 상태로 지냈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외로웠고 혼자 있으면 공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이해는 어렵지만 오해는 쉽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내 자신을 심하게 몰아세웠다.
괴로움은 짧게 스쳐 지나가지만 흔적은 오래 남는다. 가슴 깊은 곳이 훅 꺼지면서 내려앉는 느낌. 바닥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래로 떨어져 지는 공허감을 느낄 때마다 이 세상에서 소멸하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먼지처럼 흩날리면서 내가 사라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나라는 존재를 지워버리면 고통도 사라진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맞설 수 없어서 선택했던 처절한 현실도피였다.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몰입을 하면서 견뎠다. 현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주는 것들은 진통제였다. 하지만 통증은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결국 진통제 대신에 마취제나 다름없는 망각을 골랐다.
모른 척하고 살았다.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다. 정신승리나 다름없는 현실도피를 통해서 고통을 억지로 잊고 지냈다. 과거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희석됐다. 책장에 꽂혀있는 낡은 책을 보듯이 가끔씩 꺼내서 들여다봤다. 상처 위에 새살이 돋고 흉터가 남았다. 하지만 살짝 건드려보면 여전히 괴로웠다. 익숙해지는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여러 번 좌절했다. 우울한 자기 연민을 떨쳐내고 삶의 의지를 붙잡았지만 늘 손에서 빠져나갔다. 올라갔다 떨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그 사이 유약한 내면의 심지는 자주 부러지면서 나는 수시로 무너졌다.
‘괜찮다’는 표현을 말버릇처럼 되뇌면서 합리화하고 살았다. 자신을 외면했던 것 같다.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문제를 받아들이면 무너질 것 같았다.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버렸다. 오랫동안 내면의 문을 닫고 살았다. 그러다 위기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든 납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고 조급했다. 받아들일 틈도 없이 그냥 넘어갔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믿고 과거를 묻어두고 지나쳤다.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져 발버둥 치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좋았다 나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지금은 문제를 인정했다.
현실감각을 되찾으려면 사실과 감정을 구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를 돌아보고 내면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중이다. 아주 작은 용기를 조금씩 모아가고 있다. 이해하는 과정은 길고 복잡하지만 감정은 때가 되면 하나 둘 사라진다. 우울감, 절망감, 공허감, 막막함, 불안과 걱정까지 전부 다 기분이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겨낼 수 있다. 과정은 어렵다. 휴가 떠나는 날 비가 오는 것처럼 마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자신을 몰아세우고 탓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느리더라도 착실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면 삶은 천천히 변화한다.
계절이 반복되듯이 감정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우울감을 가까스로 떨쳐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또 괴로워졌다. 장마가 끝난 줄 알았는데 또다시 폭우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반복이다. 희망과 절망은 매번 교차한다. 허무하고 허탈했지만 견뎌내야 한다. 사실은 괴롭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구름은 비를 다 뿌리고 나면 지나간다. 내면의 호우주의보가 해제될 때까지 감정을 피하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안도감이 찾아온다. 살아남았다는 작은 기쁨을 느끼면서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