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닭고기조림

by 김태민

오늘은 초여름 날씨였다. 여전히 일교차는 크지만 아침저녁으로 은은하게 여름냄새가 난다.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뺨을 스치는 바람은 물기를 품고 있다. 봄날의 햇살을 담은 온기는 두 주만 지나면 한낮의 열기로 변할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기대와 후회가 뒤엉켜있는 정신없는 12월을 제외하면 딱 반이 흘렀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반환점을 빨리 도는 것 같다. 모로 누운 햇빛이 창문을 노랗게 물들였다.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됐다. 설거지를 끝내고 책상을 정리했다. 장바구니로 쓰는 에코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허기는 늘 정직하다. 밥 먹을 시간이다. 배꼽시계는 정확하다. 손질한 닭다리살 600그램을 5천 원에 샀다. 간장을 넣고 닭고기조림을 만들기로 했다. 달군 팬에 채 썬 파와 기름 그리고 고기를 넣었다. 어느 정도 익으면 술을 뿌려준다. 오늘은 맛술 대신에 생일선물로 받은 글렌리벳을 골랐다.


달콤한 과일향이 맛있는 소리를 내면서 고기에 스며든다. 센 불에서 빠르게 볶다 불을 낮추고 간장양념을 추가한다. 윤기가 도는 예쁜 갈색이 될 때까지 약불로 졸인다. 간장베이스 조림은 와인이나 위스키를 넣으면 풍미가 살아난다. 술은 훌륭한 조미료다. 취향차이겠지만 마시는 것보다 요리할 때 첨가하는 편이 낫다. 가격이나 등급을 막론하고 위스키는 도토리 냄새가 난다. 달달한 과일 향이나 매캐한 탄내를 비롯한 다채로운 향미가 감돌지만 결국 도토리 맛이다.


술이 품고 있는 향은 정말 좋은데 술 자체의 맛은 참 애매하다. 위스키뿐만 아니라 무슨 술이든 마찬가지다. 전부 다 아세톤 냄새가 난다. 알코올을 즐기는 유전인자는 내게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맛이 아니라 향만 즐긴다. 완성한 닭고기조림을 그릇에 담고 하얀 쌀밥과 함께 먹었다. 맛과 향 모두 마음에 들었다. 간도 딱 맞았다. 순식간에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뭘 했나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생각을 하기 싫어서 낮잠을 잤다. 할 일을 전부 미루고 이불속으로 도망쳤다. 그냥 편하게 쉬어도 되는 날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붕 떠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집안일을 하고 늦게 밥을 만들어먹었다. 마음이 헛헛했는데 맛있는 닭고기조림을 먹는 순간 행복해졌다. 맛있는 음식 한 입에 행복이 찾아올 때도 있다. 생각보다 삶은 단순하다. 단순하게 보면 곧바로 심플해진다. 생각을 바꾸면 장르가 변한다.


항상 통하는 법칙은 아니지만 한 번씩 변칙이 먹힐 때도 있는 것 같다. 남은 조림은 보관용기에 담았다. 녹찻물에 밥을 말아서 내일 아침에 먹어야겠다. 차게 식힌 조림이나 절임은 물에 만 밥과 궁합이 좋다. 한 끼 만들어먹고 설거지까지 끝냈더니 금세 저녁이 됐다. 운동을 다녀오면 정말 하루 끝이다. 누워서 추리소설을 읽다 잠들면 나쁘지 않은 마무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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