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창문을 노크한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비다. 5월은 오이가 가장 맛있는 계절이다. 한여름에 나오는 오이는 수분감은 풍부하지만 아삭함은 덜하다. 5월에 나오는 오이는 아삭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난다. 떫은맛도 없고 특유의 비린내도 적다. 초여름은 오이 먹기 제일 좋은 계절이다. 집 앞 마트에 들러서 싱싱한 오이를 샀다. 깨끗하게 씻어서 생으로 먹으려다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다. 며칠 전에 사다 놓은 식빵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다.
채칼 대신에 과도를 사용해서 오이를 얇게 잘랐다. 간단한 요리는 가위와 과도만 있으면 된다. 얇게 썬 오이에 으깬 통후추와 맛소금을 뿌려서 밑간을 한다. 달군 팬에 식빵 세 쪽을 넣고 한쪽 면만 살짝 굽는다. 접시에 빵을 올리고 크림치즈를 바른 후에 오이를 얹으면 완성. 간단하고 맛있는 오이샌드위치다. 크림치즈 대신에 올리브유나 명란마요네즈를 첨가해도 된다. 오이는 기름기 있는 소스와 궁합이 좋은 채소다. 고소한 빵과 수분감 있는 오이가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
차를 곁들이면 마무리가 깔끔해진다. 가볍게 우린 홍차를 마셨더니 입 안이 개운해졌다. 간단하고 맛있는 요리가 최고다. 미식의 정의는 만족감이 결정한다. 설거지 거리가 적게 나오는 요리가 좋다. 그래서 비빔밥이나 볶음밥 같은 한 그릇 음식을 선호한다. 샌드위치도 비슷하다. 만들기 쉽고 맛도 훌륭하다. 뒷정리가 간편해서 봄가을에 자주 먹는다. 오이가 맛있는 5월은 수시로 오이샌드위치를 만든다. 혼자 먹을 때는 상관없지만 남에게 만들어줄 때는 식빵 테두리를 제거한다.
영화 킬빌에서 빌이 딸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서 그런 것 같다. 남은 오이는 내일이나 모레 가스파초를 만들어먹어야겠다. 친구한테 받은 토마토가 냉장고에 아직 남아있다. 봄인가 싶었더니 궂은 날씨만 이어지다 여름이 됐다. 늘 그렇듯이 계절은 제멋대로다. 폭염이 시작되면 몇 주 안에 장마가 찾아온다. 오이가 맛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겠다. 육류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신속한 냉장유통 덕분에 전국 어디서나 신선한 고기를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과일이나 채소는 계절을 심하게 탄다.
수경재배나 하우스재배도 나쁘지 않지만 제철에 키워서 내놓는 노지재배를 못 따라온다. 유독 맛이 좋은 제철이 있다. 내 입맛은 계절을 따라간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잔잔한 노크소리는 문을 두드리는 타격음으로 변했다. 환기할 겸 창문을 열었더니 풀냄새가 거실로 밀려들어왔다. 여름냄새다. 잎사귀를 단 공원의 나무들이 심록색으로 물들었다. 꼭 포항초 색깔 같다. 빗방울이 섞인 바람이 뺨을 스쳤다. 코끝에 물기가 느껴졌다.
나무는 빗속에서 자란다. 비를 맞으면서 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우산 없이 빗속을 헤매거나 무거운 눈을 털어가며 정처 없이 걷을 때가 온다. 지난겨울부터 줄곧 마음이 힘들었다. 그래도 살아남아서 새로운 여름을 맞이했다. 맛있는 제철 오이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