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초는 80년대 JRPG에 등장하는 멋진 악역이름 같다. 수프치고는 매우 강렬한 이름이다. 더운 여름날 불을 쓰지 않고 만들어먹는 스페인의 여름수프. 초여름이 오면 가스파초를 자주 만들어 먹는다. 조리법은 간단하다. 재료를 전부 갈아서 섞은 다음 차게 먹으면 끝이다. 완성된 가스파초는 묽은 토마토소스 같은 색감을 띤다. 먹어보면 확실히 수프보다는 샐러드에 가까운 요리다.
오이와 토마토 양파를 비롯한 다채로운 채소가 들어가는 마시는 샐러드다. 90년대였다면 생소한 스페인어 대신에 녹즙이나 야채주스라고 불렀을 것이다. 20대 초반에 책에서 보고 가스파초를 처음 만들어봤다. 스페인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을 때라 만드는 방법은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가며 참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가스파초의 맛은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토마토와 양파가 맛을 좌우하는 만큼 익숙한 맛이라 거부감은 없었다. 채소를 잘 챙겨 먹으려고 여름만 되면 가스파초를 자주 해 먹었다. 잔뜩 만든 다음 커다란 볼에 담아서 두고두고 먹는다. 차게 먹는 수프지만 너무 차면 풍미가 떨어진다. 살짝 시원함이 느껴지는 온도가 딱 좋다. 자주 만들다 보니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 오이를 많이 넣으면 청량감이 확 살아난다.
감칠맛을 내려면 생토마토 대신에 삶은 토마토를 쓰면 된다. 섬유소가 익으면서 혀 끝에 와닿는 질감이 더 부드러워진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구운 식빵이나 얇게 자른 바게트를 곁들여먹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소금후추와 올리브유로 밑간을 하는 것보다 먹기 직전에 넣는 편이 낫다. 간을 미리 하면 채소의 향이 가라앉는다. 파슬리나 셀러리를 살짝 첨가해 주면 상큼한 풍미를 더할 수 있다.
스페인 정통 가스파초 조리법은 아니지만 원래 요리는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다. 10시가 좀 넘었는데 벌써 덥다. 한낮기온은 28도까지 올라갈 예정이다. 비소식도 없는데 습도는 80%에 달한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끈적이는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다. 거실의 실내온도는 26도다. 선풍기를 꺼냈다. 콩나물 국을 끓이려다 그만두고 어제 만든 가스파초를 먹기로 했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모아다 간소하게 만들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그릇에 담아서 간 통후추와 맛소금을 뿌렸다. 올리브유는 생략했다. 한 입 먹자마자 시원한 오이향이 코 끝을 치고 들어온다. 그다음 토마토의 감칠맛이 천천히 퍼진다. 볶은 양파를 갈아 넣어서 그런지 부드러운 단맛이 마음에 든다. 거실 창문 밖으로 하얀 햇살에 젖은 명학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랗고 부드러운 봄햇살은 희고 쨍한 여름의 땡볕으로 변했다. 몇 주만 지나면 나무마다 매미들이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주말 동안 내린 비는 여름의 문턱을 넘었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3월과 5월은 계절의 경계선에 걸쳐있는 달이다. 3월이 되면 세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던 차가운 겨울비는 마른 나뭇가지를 적시는 봄비로 변한다. 5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비 대신에 잿빛 구름이 몰고 온 장대비가 쏟아진다. 계절은 늘 비와 같이 몰려왔다가 비와 함께 떠난다. 이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