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식사 후 10분 정도 가볍게 산책을 한다. 발을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장도 맘도 편안해진다. 명학공원 둘레길을 걷고 집으로 가려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낮이 많이 길어졌다. 안양 8동을 내려다보는 수리산은 산등성이에 환한 띠를 두르고 있다. 산너머로 해는 사라졌지만 하얀 햇무리가 끄트머리에 걸려있다. 완연한 여름기운이 느껴졌다.
저녁공기는 끈적하고 바람은 미지근했다. 걷다 보니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왔다. 라임맛 탄산수를 사려고 마트에 갔다. 장을 볼 생각은 없었지만 청과코너에서 특가세일하는 참외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성주참외 한 봉지를 70% 할인가에 샀다. 뉴스를 보면 홈플러스가 없어지네 마네 말이 많지만 계속 영업했으면 좋겠다. 무명작가의 얇은 유리지갑은 치솟는 물가를 감당하기 힘들다.
샛노란 참외는 빛깔이 정말 곱다. 어릴 적 학교 앞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상자 속 병아리가 연상되는 색감이다. 색이 노란 과일은 대부분 달다. 바나나와 망고는 달달한 과일의 대표주자다. 여름과일 중에서 단맛으로 치면 참외가 최고다. 지금은 참외 속을 파내고 과육만 먹지만 어렸을 때는 속까지 다 먹었다. 그러다 한 번씩 배앓이를 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여름만 되면 수박이랑 참외를 자주 사다 먹었다.
과일과 채소를 박스째 싣고 골목을 도는 파란 용달차.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귓가를 맴도는 과일장수 아저씨의 돌림노래는 사람들을 부른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동네 아줌마들을 용달차 앞으로 모이게 만든다. 맛보기로 수박이나 참외를 작게 잘라주면 먹어보고 구매를 결정한다. 맘에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한 박스 들고 간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집에 과일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철과일을 가득 채워 넣은 냉장고는 엄마의 흐뭇한 보물상자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족들 저녁을 먹이고 엄마는 티브이 앞에 앉아 참외나 감을 깎아먹었다. 고단한 삶에 허락된 유일한 사치였다. 맛은 타임머신이다. 참외를 한 입 먹었더니 순식간에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리운 풍경이 까만 비닐봉지에 담은 과일처럼 덩그러니 눈앞에 놓여있었다.
삼성 브라운관 티브이 앞에 둘러앉아 연속극을 보던 세 사람. 그때는 행복인 줄 몰랐는데 이제 되돌아보니 두 번 다시없을 행복한 순간이었다. 기억은 추억이 됐다. 90년대는 까마득한 옛날이 됐다. 나도 부지런하게 나이를 먹었다. 달달한 참외 맛을 보면 엄마도 지나간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까? 제일 예쁜 참외만 골라서 에코백에 담았다. 내일 아침 병원에 가져가야겠다.
계절은 변하고 시간은 흐른다. 사진을 남겨두지 않아서 지난날들은 조각난 퍼즐처럼 기억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잊고 살다가 이렇게 한 번씩 불쑥 튀어나오면 반가움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낀다. 달콤함은 입 속에서 사라지고 성냥불을 켜놓은 것처럼 잠시 밝아졌던 시야는 어두워졌다. 베어문 참외 한 입에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추억 속을 헤매다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