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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25. 2017

9 to 6

야근은 사회문제다

 자주 연락하던 사이에 연락이 뜸해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상대방이 연애를 하느라 바쁘거나 아니면 일에 치여 바쁘거나. 20대 중반까지는 분명 전자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는데 30대가 된 지금은 후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출근은 당기고 퇴근은 늦추며 휴가는 잊혀진 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에 신경을 쓸 여유는 점점 사라진다. 그러다보니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섭섭함 대신 서로의 바쁜 생활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누구나 여유 있는 삶을 꿈꾸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초과근무와 야근을 반복하며 주말을 기다리는 생활의 반복이다. 조금 천천히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책임과 의무는 또렷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데 권리나 여유 같은 단어는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해야 할 일과 주어진 일을 열심히 처리하고 나면 늦은 저녁이 된다. 그렇게 스트레스와 피로감은 해소되지 않은 채 하루가 끝난다. 그런 생활이 한 달 두 달 일 년씩 계속해서 이어진다.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나 직업에 대한 권태가 찾아올 때 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별 것 아닌 이 한마디 속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숨어있는지 아는 나이가 되고나니 말은 줄고 술은 는다. 다들 여유가 없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내면의 여유가 없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모두들 쫓기듯이 살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모두들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적게 받는 사람은 있어도 안 받는 사람은 없는 스트레스.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모여 누적되다보면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견디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그러다보면 내면의 여유는 사라지고 타인이나 주변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게 된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누적된 스트레스 때문에 지쳐있었다. 야근이 생활화 되어있는 한국 사회다 보니 때때로 ‘남들 다 하는 건데 뭘 그러냐.’는 말을 하는 직장상사나 오너를 만나기도 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이 세상에 원래부터 그런 것 따위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수가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상관이나 대표는 역량과 자격 둘 다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에게 강제로 차출한 시간을 업무에 투여해야만 운영되고 유지되는 집단은 미래가 없다. 추가로 발생하는 근무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노동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집단 혹은 기업은 변화에 취약하다. 업무와 생활의 균형이 망가진 구성원들은 언젠가는 떠나기 마련이므로 개개인은 집단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야근이 생활화된 기업은 시장의 위기나 경제적인 상황의 변동 같은 외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초과근무가 당연시 되는 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위험부담을 분산할 수 있는 규모가 큰 기업들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일수도 있다. 다만 그런 회사들은 큰 덩치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럴 해저드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그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안전핀 역할을 하는 구성원들은 생활을 반납한 채 일하고 있겠지만. 
  
 야근 한 시간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60분은 드라마 한 편을 보거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이다. 두 시간이라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거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생산성은 전혀 없겠지만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그 자체로 삶의 여유를 준다. 회사와 집단은 내가 속해 있는 곳이지 내 것이 아니다. 거기서 쓰는 시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너와 소유주를 위한 것이다. 남을 위해 내 삶을 소비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법적으로 보장하는 근로 시간 외의 자유는 철저하게 내 것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당위성이나 이유 없는 생활화된 초과근무는 그것이 몇 시간이든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일을 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노동의 진정한 가치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데 있는 것이다. 
  
 사는 데 써야할 시간과 여유를 갈아 넣어 회사와 집단을 굴리는 사회에 장밋빛 미래가 있을까? 그런 사회의 구성원에게 진정한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에서 비롯된다.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지금이라도 악습과 폐단으로 규정하고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구성원들의 삶을 쥐어짜서 만든 시간으로 운영 되는 회사와 집단이 변화에 취약하듯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오버타임을 통해 단가를 낮추고 납품기한을 줄이는 반쪽짜리 근면성실함으로 한국 사회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선성장후분배’라는 논리로 삶의 여유를 빼앗아가는 행위는 이제는 정말 사라져야만 한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겠다면서 아직까지 과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 하나가 경쟁력이자 패권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 아직도 노동집약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갈아 넣어 집단을 굴리는 현실은 블랙코미디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삶을 빼앗아 회사와 집단과 국가를 굴려왔다. 그러나 톱니바퀴를 갈아 치우는 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인구감소로 직결되므로 이제 머지않아 우리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설 것이다. 감소하는 노동력을 대체할 외부인들을 받아들일지 노동환경을 근본적으로 혁신시킬지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그랬듯 또 다시 한 번 더 경제적 논리를 삶의 질보다 높은 우선순위에 놓는 다면 우리 사회는 영영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9 to 6 혹은 9 to 5의 원칙이 원칙적으로 지켜질 때 사람들은 삶에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건 돈 뿐만이 아니다. 사람다울 수 있는 시간 역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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