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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an 04. 2018

라멘 한 그릇

맛은 행복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한파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나는 급하게 일하러가느라 아침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가 많이 고팠다.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따뜻한 국물이 간절했다. 제일 좋아하는 김밥집의 참치김밥도 오늘만큼은 그다지 당기질 않았다. 번거로워도 밥을 차려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일본 라멘을 파는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입구에 붙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라멘 사진을 보자마자 라멘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라멘집이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집 라멘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장에서 올라온 허기가 걱정을 단 번에 눌러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라멘집은 작은 규모였다. 네 개의 테이블이 위치한 실내는 아기자기한 장식 몇 가지와 따뜻한 인상을 주는 색의 벽지로 간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메뉴도 간단했다. 네 종의 정통 일본라멘과 덮밥 3종. 주력메뉴는 라멘이었고 12시간 이상 끓인 사골육수로 만든다는 내용이 가게 내부에 떡하니 붙어있었다. 기본 중의 기본인 돈코츠 라멘을 주문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라멘이 나왔다. 4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비해 퀄리티가 상당히 좋았다. 풍성한 숙주 위에 속이 살짝 익은 반숙계란이 올려져있었고 그 옆으로 삶은 목이버섯과 두툼한 차슈가 존재감을 뿜어냈다. 뽀얗고 진한 국물을 한 숟갈 떠먹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배가 고파서 맛있는 것이 아니라 라면 그 자체의 맛이 정말 훌륭했다. 
  
 괜찮은 일본 라멘을 먹으러 한 때 합정이나 홍대의 골목을 자주 찾았었다. 일본식으로 잘 꾸며진 실내 인테리어,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일본어로 인사하는 종업원들, 맛은 있지만 한 그릇에 다소 비싼 가격. 이제까지 즐겨먹었던 라멘이 주던 이미지들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저렴한 가격, 풍부한 맛과 푸짐한 양 두 가지만으로도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작은 가게가 주는 편안함과 꾸미지 않은 진솔함이 이 라멘집을 내가 가본 최고의 라멘집으로 만들어버렸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다 비운 나는 면을 추가해서 먹고 나중에는 공기밥까지 시켜 국물에 말아먹었다. 국물 한 방울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그릇을 싹 비운 나는 밀려오는 포만감에 큰 행복을 느꼈다. 
  
 ‘잘 먹었다. 정말 잘 먹었다. 참 행복한 한 끼였다.’ 라는 생각이 드는 식사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단순히 음식만 맛있다거나 분위기가 좋은 것만으로는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한 때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녔었다. 서울 시내의 이름난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즐거움은 남들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일종의 희열감이었다. 음식을 맛보기 위해 예약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쫓기듯이 식사하는 일도 많았고 SNS나 방송에 소개되어 사람들로 북적이는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 적도 꽤 있었다. 그러다보니 식사를 하면서 느낀 기쁨이 그리 오래가질 않았다. 돌아서면 음식의 훌륭한 맛보다 그곳의 분위기와 인상만 떠올랐다. ‘맛있었다.’가 아니라 ‘가볼만했다.’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기에 나는 맛집투어를 그만뒀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맞는 나만의 맛집이 존재한다. 남들이 맛있다고 미식가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그 음식점이 내게 최고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4500원짜리 동네 라멘집은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작은 규모와 조용한 실내분위기, 훌륭한 맛과 합리적인 가격, 멀지 않은 거리. 그래서 나는 이곳을 나의 새로운 맛집으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정한 맛집 곧 자신만의 맛집은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자신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그런 맛집들을 늘려 나가는 즐거움은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과도 같다.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시도가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맛집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해본 사람만 아는 즐거움이다. 더군다나 그 음식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일 때 이제까지 먹어본 것들 중 가장 맛있을 때 그리고 내가 안락함을 느끼는 분위기를 갖고 있을 때 기쁨은 이내 커다란 행복이 된다. 바짝 얼어있는 몸을 녹여준 뜨겁고 진한 국물, 퍼지지 않고 알맞게 삶아낸 좋은 식감의 면, 풍부하게 들어간 고명. 그리고 혼자 맛을 음미하며 즐거운 식사를 하기에 최적인 가게의 아담한 규모와 편안한 분위기까지. 추운 겨울날 발견한 동네 라멘집이 내게 준 기쁨은 결코 작지 않았다. 
  
 혼자 하는 식사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외로움을 밀어내는 기분 좋은 포만감과 만족감.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4500원짜리 라멘 한 그릇으로 내가 느낀 행복은 정말 작지만 그래서 또렷하고 확실한 행복이었다. 라멘을 먹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한기와 허기를 밀어낸 포만감에 기분이 좋았다. 4500원으로 나는 하루를 즐겁게 시작할 수 있는 행복을 샀다. 맛은 행복이다. 그래서 맛있는 한 끼는 사람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참 잘 먹었다. 정말 맛있고 든든한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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