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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6. 2017

겨울맞이

시작과 끝을 함께 준비하는 마음

 몇 개 남지 않은 은행잎을 달고 있던 나무들이 전보다 좀 더 야위어 보였던 추운 아침. 올해 첫눈이 내렸다. 첫눈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겨울을 맞이한 사람들의 기다림을 심술궂게 놀리기라도 하듯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등장한다. 손을 뻗어 차갑지만 풍성한 눈송이들을 몇 개 잡아본다.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른들은 직장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있을 것이다. 공원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눈내리는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다. 달력의 마지막 계절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첫눈은 모두에게 설렘을 선물한다. 조용히 쌓이는 하얀 눈이 부드럽게 세상을 감싼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자리를 가리지 않고 눈은 천천히 깨끗한 빛으로 온 세상 물들인다. 
  
 첫눈이 내리고 나면 제대로 된 겨울이 시작된다. 차를 마시면서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한 준비가 잘되었는지 하나씩 체크해본다. 김장은 일찌감치 끝냈고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스티로폼도 잘라 붙여두었다. 공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뒷마당의 잡초도 뽑아놓았고 낙엽도 모두 쓸어 담았다. 궂은일은 다 끝냈음을 확인한 나는 옷장을 열어 겨울옷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니트 위로 일어난 보풀을 떼어내고 둥글게 말린 가디건 소매를 다리미로 꾹 눌러 준다. 보풀을 떼어낸 니트와 스웨터를 넣어놓고 옷장 맨 아래 칸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예쁜 겨울용 양말을 꺼낸다. 가지고 있는 셔츠의 색감이나 패턴에 맞춰 사놓고는 정작 지난겨울에는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었다. 단정한 윈저 칼라 셔츠와 대비되는 유쾌한 패턴의 양말들을 올 겨울에는 자주 신고 나가야겠다. 선물 받은 화려한 컬러의 양말은 내년 겨울쯤에나 신어봐야지.
  
 차곡차곡 개놨던 머플러를 울샴푸를 푼 따뜻한 물에 잠시 넣어두고 드라이크리닝을 맡길 코트를 꺼내 커버를 씌운다. 옷마다 지난겨울의 냄새가 배어있다. 희미한 커피 향이나 겨울에만 뿌리는 향수 냄새 같은 것들. 코트 안쪽 주머니 안에서 명함 두 개를 발견했다. 어딘지 모르는 카페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함을 한참 바라보다 손으로 구겨버렸다. 기억나지 않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잊고 싶은 나쁜 기억은 사실 잘 잊혀 지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커피가 맛이 없었다거나 함께한 사람이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일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구겨진 명함은 쓰레기통으로 떨어진다. 
  
 머플러를 손빨래해서 널어놓고 거실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어둔다. 청소기를 돌린 후에 나는 책장에 달라붙어있던 먼지들을 닦아낸다. 철지난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 쌓아놓고 보니 또 한 묶음이다. 책은 이제 정말 그만사야겠다. 남들이 백화점에 가면 충동구매로 옷이나 신발을 사듯 나는 서점에만 가면 책을 꼭 한 권은 사서 나온다. 겨우내 읽을 책은 충분히 쟁여놓았으니 이제 연말까지 책은 정말 한권도 사지 말아야겠다. 장롱에서 겨울용 솜이불을 꺼내 침대에 펴 덮어두는 것을 끝으로 정리가 끝났다. 좋아하는 향초에 불을 붙여놓고 음악을 틀었다. 브라이언 세처가 연주한 징글벨을 듣고 있자니 연말 느낌이 확 살아났다. 캐럴만큼 이미지를 극적으로 동기화시키는 음악은 없다. 지나간 크리스마스나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한 소절만 들어도 순식간에 떠오른다. 
  
 먹지도 않는 지팡이 사탕이나 강제로 주입된 코카콜라를 들고 있는 하얀 북극곰 같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흥겨운 리듬은 향초가 뿜어내는 좋은 냄새와 더불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내리는 눈을 보며 캐럴을 듣고 있으면 한 해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시간은 상대적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이다.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천천히 그러나 결국에는 지나간다. 시간은 결국 언제나 순간이다.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아주 오래 머무를 것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모두 다 지나간다. 올 한해가 최고였든 최악이었든 남아있는 평생이란 시간과 비교하면 1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잃은 건 잊어버리고 놓친 건 놓아주어야한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지금 남아있는 것들에 감사하고 지나간 것들은 보내주는 게 맞다. 
  
 몇 주 전만해도 늦가을 분위기가 제법 남아있었다. 낮 기온이 포근한 탓에 입고 있던 코트를 들고 다니는 일도 종종 있었고 바람에 날리는 샛노란 은행잎도 자주 보였다. 가을의 끝을 의미하는 밤비가 내린 후에 겨울이 찾아왔다. 첫눈이 그치고 나면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고 12월에 들어서면 거리 곳곳은 연말 분위기에 물들 것이다. 만난 지 오래된 사람들을 만나 모처럼 만의 근황을 확인하고 늘 곁을 지켜준 좋은 사람들과 새해의 소망을 함께 나눌 것이다. 겨울은 그래서 새벽을 닮은 계절이다. 새벽이 밤의 끝이면서 동시에 아침의 시작이듯 한해의 끝과 새로운 해의 시작 둘 다 겨울 안에 있다. 그래서 겨울은 설렘과 아쉬움을 함께 품고 있다. 첫눈을 기다리면서도 막상 한 해가 끝난 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쉬운 것처럼. 
  
 한 달 정도 남은 올 한해를 예정보다 일찍 보내줘야겠다. 마음을 비우고 정리하는 일정을 앞당기면 새로운 기대와 행복을 조금 더 빨리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즐거웠던 시간과 행복했던 순간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후회와 아쉬움이 남은 기억들 역시 차분하게 살펴본다. 남의 잘못은 용서하고 나의 잘못은 반성한다. 빨래를 하듯 묵은 감정은 벗겨내고 고집스럽게 구겨져있던 마음에 다림질을 한다. 내 위주로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 멀리 떨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때의 내가 참 어리석었다는 부끄러운 진실을 받아들인다. 나쁜 것은 결국 하나도 없었다. 모두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시간들이었고 배울게 있는 사건들이었다. 한 해를 평가하는 성적표대신 여기 잘 살다갔다는 이름표를 마음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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