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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8. 2017

기억의 정리

물건을 정리하듯 마음 비우기

 모처럼 날이 좋았다. 아침 공기는 겨울임에도 햇살에 적당히 데워져 포근하게 느껴졌고 밤새 날리던 진눈깨비가 그친 하늘은 맑은 푸른빛이 돌아 예뻤다. 창문을 전부 열어 신선한 공기를 집 안으로 들여놓는다. 이브자리를 개고 향초에 불을 붙인다. 홍차를 한 잔 마시려고 찻주전자를 올려놓고 어질러져있던 책상을 정리한다. 밤새 고여 있던 묵은 공기가 창밖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씻겨나간다. 달력의 마지막장을 차지하고 있는 12월 첫째 주의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새해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아직은 낯설다. 12월 31일의 시계가 자정을 넘기기 전 까지는 내게 겨울은 모두 똑같은 온도와 풍경을 품고 있는 계절이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겨울 속에 있다. 그래서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12월이 시작되기 전 긴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정리를 시작한다. 일 년에 두 번 나는 잘 입지 않는 옷과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모아 기증한다. 여름에 한 번 그리고 겨울에 한 번. 그러다보니 연말에 기증할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거실에 카펫 위에 기증하기 위해 모아놓은 옷과 생활용품들을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망가지거나 더러운 부분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다보니 물건에 깃든 기억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르바이트해서 모든 돈으로 떠났던 첫 해외여행을 함께한 여행가방.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사놓고는 한 번도 신지 않았던 갈색 옥스퍼드구두.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줄곧 옷장에 걸려있던 재킷. 가치와 용도를 떠나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에는 기억이 저장된다. 기억의 좋고 나쁨은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자신에 의해서 결정될 뿐. 이미지와 함께 물건이 품고 있는 기억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네이비 컬러의 재킷은 빳빳하게 잘 다려진 모습 그대로 옷장에 걸려있었다. 나는 주머니 안쪽에 있던 청첩장을 보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킷을 샀던 것을 기억해냈다. 저장되어 있던 기억은 회상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오래된 이미지들을 선명하게 만든다. 광명역에서 타고 내려갔던 역방향의 KTX, 열차를 기다리면서 먹었던 던킨도너츠와 커피,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결혼식장의 뷔페까지. 지나간 풍경들이 차례로 떠오르면서 잊고 있던 감정들까지 되살아났다. 밝은 갈색의 옥스퍼드구두를 처음 샀던 날의 기쁨이나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국제선 출국수속을 밟던 설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건들은 낡았지만 기억은 처음 그대로였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나 누군가의 기억이 덧입혀질 물건들. 나만이 읽을 수 있었던 추억이란 시간의 언어들이 곧 사라진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기억들 역시 함께 처분한다. 시절이든 사람이든 깃들어 있던 이미지들은 주인이 바뀌는 순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된다. 소설 해리포터에는 호크룩스라는 마법이 나온다. 자신의 영혼을 물건에 쪼개어 저장해두는 마법. 기억들은 호크룩스처럼 깃들어있다 물건과 함께 사라진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도 아닌데 작게나마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오래전에 선물 받았던 플로베르의 책과 기차에서 읽으려고 샀던 하루키의 에세이, 겨울날씨와 잘 어울릴 것 같아 큰맘 먹고 구입했던 니트 타이, 그리고 비닐 포장도 벗겨내지 않은 오일파스텔까지.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새 주인을 만날 단장을 끝마친다. 
  
 기증센터에 도착한 나는 가져온 물품의 목록을 작성하고 싸인을 한다. 그동안 직원 둘은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고 택을 만들어 붙인다. 확인증을 건네받을 때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면 기증절차가 끝난다. 갈 때는 무겁던 양 손이 돌아 올 때 가벼워진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나 똑같다. 떠나보내고 나면 가뿐해진다. 없어도 괜찮다. 정말 필요한 것들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이미 다 가지고 있다. 물리적인 공간을 비워내듯 사람의 마음도 비움이 필요하다. 보내는 아쉬움은 잠깐일 뿐. 비움에서 오는 편안함이 금세 자리를 채우면서 마음은 안정을 찾는다. 
  
 물건도 마음도 주기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12월. 놓지 못하고 있던 것들은 놓아주고 먼지처럼 쌓인 감정들은 털어내기 좋은 때다.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낡은 기억들을 함께 비워버렸다. 사소했든 소중했든 지나간 것들은 모두 추억일 뿐이다. 때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안고 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일도 필요하다. 내면을 비우고 마음을 정리하는 습관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비우는 일을 연습한다. 그리고 내면을 정리하고 나면 정말 소중한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변함없이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항상 감사함이 들게 만드는 기억들. 버리고나면 비우고 나면 비로소 알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의 또렷한 우선순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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