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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K May 18. 2023

노키즈존.. 소통은 어디에나 있다

소통은 중요하다.

가임여성(15~49세) 1명당 아이를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0.8명이 되었다.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 수가 줄면서 전국적으로 폐교가 증가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젊은 층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노인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 65세 이상의 고령인구 비율이 14% 이상이 되어 고령사회에 이미 들어섰다. 이런 과정 속에 나오는 사회적 이슈가 키즈, 젊은 층의 고용 문제, 노인 인구 부양 문제,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이다.

과거에는 한 가족이 한 집에서 대가족을 이루면서 살아왔다.

조부모, 부모, 삼촌 그리고 아이들까지 당연히 그때는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주택에 사니 시끌벅적해도 어떻게든 좁은 공간에서 비집고 살 수 있었다. 집에 어르신들이 있으니 눈치를 보는 상황은 늘 존재했다. 할아버지의 권위에 집안은 예의범절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답답한 통제를 받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집안에서 연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런 영향에 조심스러운 행동들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가정교육이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도 서로 같이 지내며 서로의 생각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서로가 불편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또한 동네의 행사나 옆집 잔치가 있으면 누구랄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를 했다. 이런 과정 속에 세대 간 이웃 간 소통은 이루어졌다.


신문 기사를 보다 보니 요즘 노키존에 대한 이슈가 등장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의 '노키즈존(어린이 출입금지 공간)' 확산에 주목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는 한국에서 어린이 출입 제한 공간이 늘어나는 건 육아의 어려움을 더 강조하고 출산을 보다 꺼리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머니투데이. 한 노키즈존 500곳, 문제는... 윤세미 기자. 23.5.15>



키즈의 소란스러움을 수용할 수 없다는 표시이다. 출생률이 높아 아이들이 많았던 시대에는 노키즈존이라는 용어가 어색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아이들이 줄어드는 세상임에도 노키존이 더 많이 증가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니 사람들과 세대 간의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혼이 증가하고 만혼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키즈에 대한 이해도 많이 줄어들고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에 거부감을 보인다.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대가족 형태의 가정교육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던 분위기가 소가족 형태에서 자식에게만 집중하는 부모들의 욕심으로 아이의 통제력을 많이 잃은 것도 사실이다. 아이가 공공장소에 있으면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행동과 울음소리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지하철을 타던 비행기를 타던 아이의 소란을 반가워할 사람은 없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조차 다른 사람의 아이의 지나친 행동은 눈살 찌푸리게 한다. 분명한 것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 간의 불편함의 차이가 존재하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는 태도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한다. 결국 서로 간의 소통이 진행되어 서로의 이해를 높여 가야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지만 소통의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재미있는 현상은 지금 사회 분위기는 노키즈존은 증가하고 오히려 반려동물의 출입은 늘어가는 추세라는 것이다.


아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인의 문제들도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젊은 층은 기성세대가 누렸던 경제적 이득에 대한 불만들이 상존하며 취업난과 주거 비용 등에 대한 고민들이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인구를 부양하는 책임을 본인들이 져야 하는 게 답답하기만 하다. 노인분들은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기보다 과거의 모습에 집착해서 젊은 층의 생각들이나 행동에 불만을 표출한다.


결국 출산율, 노키즈존, 노인문제 등 서로 간의 교류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의 세분화된 사회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기회조차 없이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가 분열되고 갈라서고 소통이 없는 불통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소통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수용력과 포용력이 적용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단순히 소통하세요 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회사 내에서도 소통이 늘 부족하다고 말한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고 서로가 오해 속에서 사일로가 생기고 그 벽을 허물어 가기가 쉽지 않다. 서로를 알기 위해서 서로가 만나고 교류하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늘 회사들의 화두는 소통이다. 소통 경영을 바라지만 소통은 요원하고 어떤 방법으로 서로의 이해도를 높이며 소통할 수 있을까 비용을 써 가면서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모든 관계의 핵심은 우리가 매일 주고받는 의사소통에 있다.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은 두 사람의 대화가 단지 관계를 '만들거나' '수정하는' 것에 그친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대화 그 자체가 곧 관계다. <소통_존 스튜어트. 15.12>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관점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



서로를 알 필요가 없으면 굳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을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가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고 타인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는 사회일수록 소통은 더욱 목말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자신의 박스 안에서만 보지 말고 다양한 부분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수용하며 포용하려고 노력해야 소통은 가능한 것이다.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생텍쥐페리 >


인간이 인간으로서 관심을 갖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소통의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소통이 이루어질 때 오해와 반목은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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