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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K Sep 06. 2023

선생님들의 울부짖음이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다.

학부모가 보는 교권의 상실

몰입은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하며 에너지를 한 곳에 몰아 쓰는 것을 말한다. 몰입은 우리에게 도파민을 생산해 내고 우리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호르몬이다. 도박, 보상, 음식 등 도파민이 주는 쾌감에 우리는 과한 몰입을 하게 되기도 한다.


도박이나 게임에 몰입하면 아이나 어른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된다. 게임에서 지면 인생에서 진 듯 날뛰기도 하고 이기면 쾌감에 빠져 더 중독되게 된다. 몰입은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시간을 절대적으로 만들지 않고 상대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하지만 쾌감을 느끼 것 못지않게 사회적 우울감에 몰입하게 되면 비극이 발생한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판된 후 이 책을 읽은 다수의 청년들이 베르테르의 죽음을 따라 자살했던 현상에서 유래한 말인데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사람의 자살에 심리적으로 동조하여 모방 자살 시도가 잇따를 때 말하는 용어이다. 꼭 모방자살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아파하고 슬프고 우울했던 부분들이 내적으로 감추어 있다가 하나의 사건으로 밖으로 표출되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 후에 교사들의 현재의 아픔들을 더 깊게 생각해 보게 한다. 교사들이 갖는 직업 상의 고충과 우울함이 밖으로 표출되며 교권의 상실로 인한 슬픔까지 사회적으로 몰입되어 교사들의 비극적 상황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은 감정적으로 소모량이 많고 힘든 일이다. 특히 사람들의 감정에 휘둘리고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군대 문화가 뿌리 박혀 있던 군사독재시절에는 선생님이 폭력을 써도 어쩔 수 없이 학생이 받아들여야 했던 때였다. 선생님의 말은 절대복종을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선생님의 수준과 역량이 지금의 선생님들보다 월등히 우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었다. 시대와 교육 시스템이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은 학교 내 교사의 위상이 너무 많이 상실된 상황이다.


과거에는 선생님이라는 자리가 학생들의 삶과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선생님은 어른으로서만 아니라 스승으로서 배워야 하고 고마운 분으로 생각했었다. 지금은 선생님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스승이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은 선생님의 문제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와 교육 시스템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이격이다.


학교 시스템은 이미 학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고 학교 내 선생님들의 권한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책임만 부여하는 일꾼으로 선생님들을 내몰아 버렸다. 정치인들은 현장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자신들의 표를 얻기 위한 포장된 말로 학생들의 인권만 부르지 졌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좋지 못한 영악함을 통제할 수도 없이 학생을 가르치며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학생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사회가 과거와 달라져서 충분히 학교에서 자정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자정 능력을 무시하고 학생과 부모들의 입김에만 움직여지는 학교를 만들어 놓고 모든 책임은 교사에게 떠 넘기는 무책임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가 반성할 부분이다. 교사를 보호하는 장치는 없이 학생들의 인권이라는 아주 원론적이고 보기 좋은 것들로만 치장해 놓으면 스승은 존재할 수 없다.


정치인들과 교육정책자들은 학교 현장의 현실적 고충을 듣고자 하는 노력은 없다. 자신들의 선거 당선을 위한 한표 한 표 만을 위해 현장의 슬픔과 고통을 등한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일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최고인 양 자식의 문제조차도 모든 책임과 잘못을 선생님께 돌려 버렸다.


과거에는 자식이 선생님에게 혼나고 체벌까지 받게 되어도 마음은 아프지만 자식이 잘못한 게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인내하며 자신과 자식을 돌아보고 반성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생님에게 법적 소송을 걸어 괴롭히고 심적 압박을 주며 교사로서 정상적 일을 할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폭력과 욕설을 통해 선생님의 자존감까지 무너트리고 있다.


학생이 선생을 교실에서 때리고 욕을 하며, 휴대폰을 수업시간에 제재 없이 보려 하고 선생님의 약점들을 영상에 담아 협박까지 하는 현상도 학교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악화되는 학교의 환경들을 보고 있으면 현재의 상황이 너무 서글퍼진다. 몰상식한 부모들은 늘 선생님을 자신 밑에 있는 일꾼으로 생각하며 다그치고 모든 책임을 선생에게 돌리는 현상은 참아 보기도 어렵기까지 하다.



선생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영향력만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 선생님들은 일을 열심히 안 하는 것이 본인들을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학교의 정상적 운영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거나 새로운 것들을 하려 하면 학부모들의 간섭이 두렵고, 못된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하는 것조차 본인의 책임이 되는 판에서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은 보호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묵묵히 학생들의 이상행동에도 저지하지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왜 서이초 선생님의 죽음에 그렇게 많은 선생님들이 이익 단체집단과는 다르게 자발적으로 개인들이 나와 목 터져라 집회를 하는지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이익을 고려한 기업 노조의 파업과는 다르게 개인으로서 자발적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과 처절함의 표현일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행정잡무에까지 시달리며 슬프고 외롭고 괴롭움을 이해해 달라는 울부짖음이고 선생님을 개인으로서도 보호해 달라는 움직인 것이다.



아프다.


선생님들의 권위가 이렇게 무너졌다는 게 너무 슬프다. 우러러보던 선생님의 위상은 사라지고 정치적 활용에 시스템이 무너진 게 너무 서글프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교 교육이 달라진 것은 이해하나 그래도 아이들이 보고 배워야 하는 선생님의 권위를 이렇게 짓밟도록 놓아둔 정부, 정치인, 교육계 모두가 반성했으면 한다.


자기의 아이만 사랑스럽고 소중하다며 본인들의 가정교육의 잘못을 외골수적이고 무절제하게 남에게 돌리는 부모들은 반성하고 혼나야 한다. 이제라도 베르테르의 현상을 막고 선생님의 권위를 제자리로 돌려놓았으면 한다. 지금의 무거운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사회는 귀 기울여야 한다.


그건 학교가 외부의 경제논리와 정치논리, 바람직하지 않은 학부모들의 폭력에서 벗어나 그들이 진정성 있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가능하다. 좋은 스승 아래 좋은 제자가 나오고 좋은 제자가 나와야 사회는 선순환의 고리를 이어갈 수 있다.


가정의 교육이 세워져야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학교에서라도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사회는 간절히 고민해야 한다.


한 명의 부모로서 작게나마 선생님들을 응원합니다.


교육은 그대의 머릿속에 씨앗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씨앗들이 자라나게 해 주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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