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유시민 작가는 박식하고 생각의 폭이 넓은 평론가이며 학자이며 작가입니다. 유시민 작가의 글을 보거나 토론을 듣다 보면 어찌 저렇게 다양한 생각과 지식을 갖출 수 있을까라는 부러움이 생깁니다.
이젠 인문학에서 자연과학까지 공부하며 인문학의 한계를 짚어 보면서 더 깊은 인문학을 이해시키고 과학이 우리 생활 속에 어떤 의미이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수학, 과학이 싫으면 대학을 선택할 때 문과를 지원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냥 회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복잡한 숫자와 수학 공식들이 난무하고 화학기호가 언어로서 자연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게 귀찮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유시민작가의 글은 뭔가 우리에게 과학이란 분야를 쉽게 설명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다는 이해 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깊게 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아래의 문장이 와닿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생각과 경험, 책을 통해 지식을 넓혀 왔고 그것들을 통해 나만의 논리를 펼치며 논쟁도 해 봤습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찬반논쟁에 의해 상처도 받고 화도 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사고의 폭은 인문학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인문학을 강조했습니다.
인문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학이라는 기초하에 인문학은 존재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도 내가 물질이라는 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보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각도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뇌는 물질이고 몸의 일부입니다.
이 책을 읽고 흘려보내면 기억에서 지워질까 봐 걱정스러워 컴퓨터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필사했습니다. 괜찮은 문과 작가가 과학을 괜찮게 설명하고 인문학과 과학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과학자가 아닌 인문학 전문가가 쓴 과학 관련 서적이 이렇게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되어 읽는 내내 좋은 기억을 갖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믿음이 강하시고 유일신을 믿으시는 분들에게는 읽다 보면 이견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과 사고의 폭을 넓히며 유연한 생각을 위해서는 이 책을 꼭 읽어 보길 추천합니다.
* 읽기를 추천하는 사람: 인문학만 공부하신 분,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으신 분, 과학을 쉽게 이해하고 싶으신 분, 과학이 싫어서 문과에서 공부하시는 분, 이과를 지원했지만 문과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으신 분
* 개인적 평점 : 5점 만점에 4.5점
* 한 줄 메시지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문학적 질문이지만 가장 먼저 질문을 해야 할 것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과학적 질문이다.
과학은 인문학보다 힘이 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의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학자는 물리법칙에 입각해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한다. 인간의 몸은 입자의 집합이니 당연히 물리법칙을 따른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으로 인간과 사회를 다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원자는 생각하지 않지만 원자의 집합인 인간은 생각한다. 사람은 유전자가 만든 생존기계인데도 때로 본능을 거스른다. 본성을 알고 욕망을 제어하며 스스로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과학이 더 발전해도 인문학은 인문학의 길을 갈 것이다. 인문학은 생존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고 만든 학문이다.
과학을 전혀 몰랐을 때 나는 세계를 일부 밖에 보지 못했다.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전체를 보지는 못하며 인간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이론을 활용하면 인간과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나는 무엇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나는 뇌다' 이것은 사실을 기술한 과학의 문장이 아니라 자아의 거처를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이다. 뇌는 물질이지만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내가 뇌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말한 것은 뇌를 떠나서는 철학적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뇌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모르고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이해할 수가 없고,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모르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말한다. '나는 뇌다'
사람 뇌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한다. 그래서 1.4킬로그램 안팎으로 평균 체중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도 혈액의 25퍼센트와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쓴다. 뇌는 약 860억 개의 신경세포가 얽힌 정글이다. 뉴런마다 줄기인 축삭돌기 하나와 많은 수상돌기가 있는데, 수상돌기로 다른 뉴런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축삭돌기로 정보를 내보내면서 100조 개 넘는 연결망을 만든다.
한 뉴런의 돌기와 다른 뉴런의 돌기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사이의 빈 공간인 시냅스에서 화학물질을 주고받아 교신한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유발하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뇌는 부위마다 하는 일이 다르다. 예컨대 귀 안쪽의 해마는 기억을 담당하고 이마 쪽 전전두엽은 의사결정에 관여한다. 뒤통수 쪽 후두엽은 시각정보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측두엽 안쪽에 있는 편도체는 공포 반응과 주의 집중에 관련된 여러 부위에 신호를 보낸다.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전자기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상호 변화를 유도하면서 퍼져 나가는 파동으로, 진행 방향과 과수직으로 진동한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데 매우 긴 것부터 극히 짧은 것까지 파장의 길이가 매우 다양하다.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파장이 긴 전자기파는 초당 진동수가 적고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많다.
인간의 신경세포는 파장이 380~720 나노미터인 전자기파만 감지한다. 그것을 '가시광선' 또는 '빛'이라고 한다. 우리 뇌는 가시광선 영역의 전자기파를 파장의 길이에 따라 긴 쪽부터 '빨주노초파남보'로 인식한다. 파장이 720 나노미터보다 긴 전자기파(적외선)와 380 나노미터보다 짧은 전자기파(자외선)는 감지하지 못한다.
빛이 입자이고 파동이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이자. 모든 입자가 그런 것처럼 빛도 일정한 양의 에너지가 있다. 태양이 내뿜은 빛의 에너지는 지구에서 공기를 만나 열에너지로 바뀐다. 우리가 햇볕이 따스하다고 느끼는 것은 빛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빛이 공기를 데우고 우리가 따뜻해진 공기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진공에서도 '빛의 속도'로 달리는 빛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자신의 에너지를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덜어 준다. 이 현상을 우리는 복사라고 한다.
독일 물리학자 플랑크는 빛의 에너지를 파장별로 측정하는 과정에서 빛에는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에너지 값을 가진 진동자가 있다고 추측했다. 플랑크는 빛의 복사가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의 방출, 전달, 흡수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발견한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양자'다.
자아를 찾아라. 인격을 닦아라. 정체성을 지켜라. '자아''인격''정체성'은 무엇인가. 일단 물질은 아니다. 원자 단위까지 쪼개도 헛일이다. 인문학자는 그런 것이 있다는 전제를 두고 인간과 사회를 연구한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인문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스물다섯 살 무렵, 우연히 '맹자'를 읽고 '4단론'을 받아들였다. 맹자는 군자의 미덕인 인의예지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는 본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본성을 갈고닦아 인의예지를 갖춘 군자가 되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나를 지켜 나가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본성이 내게 정말 있는지, 증거를 살피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맹자가 말한 네 가지 마음은 모두 우리 뇌에 깃들어 있다. 인간의 뇌는 작은 신도시가 아니라 오래된 대도시를 닮았다. 설계도에 따라 창조한 기계가 아니라 맹목적인 진화의 결과 나타난 기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를 도시로 치면 번화하고 질서 정연한 정부청사 단지와 약육강식 원리가 지배하는 뒷골목 등 새롭고 아름다운 것과 낡고 추악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우세한 지에 따라 도시의 성격이 달라지고 명암이 엇갈린다.
에드워드 윌슨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한다." 나탈리앤지어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맹자는 과학적인 태도로 인간과 세상을 마주했다.
시간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그 무엇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시간을 무한정 견뎌내는 것은 없다. 시간은 영원을 서약했던 사랑을 끝나게 한다. 찬란한 우정을 빛바래게 하고 강철 같은 신념을 부스러뜨린다. 사람의 몸을 늙게 만들고 생기발랄했던 철학적 자아를 혼돈과 무기력에 빠뜨린다.
사람은 변한다. 그런데 그게 꼭 좋지 않은 일일까? 시간이 흘러도 늘 같은 모습인 게 반드시 좋은가? 그렇지 않다. 좋게 달라지면 변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그런 변화는 '발전'이라 하고 더 못해지면 '퇴행'이라 한다. 발전인지 퇴행인지 판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없다. 한 사람의 변화를 두고 발전인지 퇴행인지 다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김지하 시인 말고도 좋아했던 여러 소설가, 시인, 교수 등 비슷한 방식으로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다만 떠나보냈을 뿐이다. 그들의 인생은 그들이, 내 인생은 내가, 인생은 각자 책임지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타인의 삶을 재단하겠는가. 좋으면 가까이, 싫으면 멀리, 그렇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어찌 강고하겠는가.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인문학보다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 전향이라는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나를 나로 인식하려면 기억이 뚜렷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잃으면 남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뇌의 하드웨어가 심각한 손상을 입으면 몸과 정신 모두 기능마비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흔들리고 갈라지는 땅 위에 서 있는 집과 비슷하다. 뇌는 소프트웨어도 있다. 뉴런이 서로 연결해 작동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이다.
우리의 자아는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땅 위에서 전자와 신경전달 물질의 홍수와 가뭄과 해일과 폭풍우를 견뎌야 한다. 자유의지더러 모든 악천후를 극복하고 철두철미한 일관성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전향은 뇌의 시냅스 연결망과 연결 패턴의 변화로 생긴 현상일 수 있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 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해일과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런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언하지 못하겠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호모 사이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에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종의 기원 결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종은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다'
모든 생물은 키울 수 있는 것보다 많은 후손을 낳는 경향이 있다. 개체는 변이가 있다. 생존에 유리한 변이를 지닌 개체는 불리한 변이를 지닌 개체보다 생존할 확률이 높고 자손을 퍼뜨릴 가능성도 크다. 그리하여 생존에 유리한 형질은 널리 퍼지고 불리한 형질은 소멸한다.
우파는 생존경쟁을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간주하고 격차와 불평등을 발전의 동력이라고 옹호하며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정책에 반대하는 개인과 집단이다. 좌파는 사회적 약자, 착취당하는 사람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개인과 집단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은 유전자선택론이다. 생존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로 보는 이론이다.
모든 생물의 DNA가 똑같이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보았다.
DNA는 우아하게 맞물린 한 쌍의 나선형 뉴클레오티드 사슬이다. 불멸의 코일을 만드는 뉴클레오티드는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 G(구아닌)이라는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생명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연결 순서만 다를 뿐, 모든 동식물의 DNA는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
DNA 분자는 복제를 잘한다. 설계도 원본이 든 세포 하나가 각각 설계도 사본 전체를 가진 세포 2개로 분열하고... 개로 늘어나 세포 1,000조 개로 이루어진 인간이 된다. 모든 세포에 알파벳 4개로 쓴 '몸만들기 설명서' 전체가 들어 있다.
모든 생물의 DNA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게 뭐 그리 감동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왜 아닌지 되묻고 싶다.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로 '존재의 고독'을 덜 느낀다. 동네 공원에 아무렇게나 핀 풀과 꽃, 모르는 사람과 산책하는 개 등 예전보다 가깝게 여긴다.
그렇지만 나는 나, 나무는 나무였다. 나무에 감정을 이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전자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달라졌다. 나무가 살고 죽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나무가 어떻게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나는지 알고 감탄했다.
나무는 한 자리에서 서서 계절을 여행한다. 모든 유기체가 그렇듯 나무도 물을 품고 있다. 물이 얼어 팽창하면 세포가 터진다. 죽지 않으려면 겨울 여행을 잘해야 한다. 동물은 세포에서 당을 태워 열을 내지만 식물은 다른 방법으로 추위를 견딘다. 겨울이 다가오면 잎에 보내던 수분과 영양분을 끊는다. 그래서 단풍이 이들고 낙엽이 진다. 우리에게 가을의 정취를 선사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에 나무는 둥치와 가지의 세포에서 물을 내보내고 당과 단백질 같은 영양분만 남겨 세포 내부를 시럽 상태로 만든다. 세포 사이 공간에는 물이 있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원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순수해서 섭씨 영하 40도까지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서리와 진눈깨비와 눈보라와 혹한을 견디고 나서 봄의 징후를 포착하면 나무는 물을 세포 안으로 끌어들여 새잎을 틔우고 광합성을 재개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우리는 대단히 복잡하고 독특하게 발전한 생존기계다. 유전자가 명하는 본능에 따라 사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감정을 느끼며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모든 종에게 유전자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성장하라, 짝을 찾아라. 자식을 낳아 길러라. 그리고 죽어라. 너의 사멸은 나의 영생이다. 너의 삶에는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목적을 추구한다. 살아서는 유전자의 굴레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굴레에 묶여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나는 유전자가 만든 몸에 깃드러 있지만 유전자의 노예는 아니다. 본능을 직시하고 통제하면서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행위로 삶의 시간을 채운다.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목표를 추구한다.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한을 내가 행사하겠다.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유전자는 적어도 100만 년 단위로 나이를 헤아려야 할 정도로 오래 생존하는, 끝없이 자기를 복제하면서 여러 생존기계의 몸을 옮겨 다니는, 네 가지 염기가 특수한 순서로 이어진, 충분히 작아서 잘 흩어지지 않는 염색체 조각이다. 목적의식이나 지향 같은 건 없다. 끝없이 자기를 복제하면서 온갖 생존기계를 만들 따름이다.
유전자는 유전자, 나는 나다. 유전자는 생각하지 않지만 유전자가 만들어낸 나는 생각한다. 둘은 차원이 다르다. 유전자는 복제할 뿐이고, 나는 인생을 나름의 의미로 채우며 살아간다. 나보다 오래 산다고 해서 유전자가 부럽지는 않다.
인간이 군집을 이루어 사는 사회성 동물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불편하다. 유전자는 생존기계가 배타 행동을 하든 이타 행동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개인은 배타 행동도 하고 이타 행동도 함쳐서 그것이 초래한 결과를 각자 감당한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단은 클수록 더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집단은 행위의 결과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특정 종의 생존에 관심이 없다. 모든 종의 모든 개체에 서식하고 있으니 어떤 종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에서 지구를 구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없을 때도 지구와 생물은 존재했다. 인류가 사라진다고 해도 지구에는 아무 문제없다. 기후위기와 핵폭탄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려면 인류 전체가 협력해야 하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 확신할 근거가 없다. 그래도 무언가 해야 한다. 우리 자신 말고는 누구도 우리를 구할 수 없으니까
내가 오로지 수학 재능이 없어서 문과가 된 건 아니다. 물질의 변화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다. 소금을 물에 넣으면 소금은 녹아 보이지 않고 물은 짠맛이 난다.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았다. 물에 넣으면 녹는 게 어디 소금뿐인가. 원래 다 그런 것이려니 했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고, 짚이나 종이에 대면 불길이 번진다. 불꽃을 피우고 열을 내뿜고 재와 그을음이 남는다.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았다. 불에 타는 게 어디 짚과 종이뿐인가. 원래 그런 것이라 여겼다. 밤하늘의 별이 무엇인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결합해서 어떤 물질의 분자를 이루는 원소는 보통 두 종류 이상이지만 산소, 금, 다이아몬드처럼 원소가 하나인 물질도 많다. 더 작게 나누면 고유의 성질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물질의 기본 성분'인 원소는 원자와 같고 또 다르다.
물리학 책에는 주로 원자가 나오고 화학 책에는 원소와 원자가 뒤섞여 나온다. 한참을 헤맨 끝에 나름대로 이해했다. 원자는 원소의 한 단위다. 생물학 언어로 하면 원소는 호모사피엔스, 원자는 한 사람이다. 물질의 성질과 변화를 연구하는 화학자에게는 원소가 중요하고, 미시세계의 역학을 탐구하는 물리학자에게는 원자가 중요하다.
둘 이상의 원자가 서로 전자를 공유해 화합물을 만드는 것을 '공유결합'이라 하고, 전자를 방출하거나 영입해 양이온이나 음이온이 된 원자들이 서로 끌어당겨 화합물을 만드는 것을 '이온결합'이라고 한다. 공유결합이 만든 분자화합물은 부드러워서 액체나 기체가 많은 반면, 이온결합이 만든 이온화합물은 고체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분자화합물인 물은 액체, 이온화합물인 소금은 고체다. 그렇지만 원자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은 두 경우 모두 전자다.
생물의 세포는 화학공장이나 마찬가지다. 여러 물질이 작용해 영양분을 흡수하고 폐기물을 배출하며 신진대사에 필요한 효소를 만든다. 모든 공정에서 물이 필수다. 물이 없으면 세포라는 화학공장을 가동할 수 없다. 물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인간 세포 질량의 70퍼센트가 물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산소가 욕심이 많아서 다행이다. 산소가 전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 놓지 않는다면 물은 아무것도 녹이지 못할 것이다.
전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몰랐다. 원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물질을 이루는 것, 우리 몸이 생존에 필요한 화학공정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이 다 전자 덕분이다.
상대성원리를 적용해야 하는 광대한 우주 공간과 양자역학으로 서술하는 미시세계는 언어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수학으로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우주의 언어를 모른다.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개인적 생각: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세상을 어찌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배우고 언어가 표현하는 사실과 지식을 알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원자는 최외곽 전자껍질을 채우려는 욕망 때문에 다양한 분자와 이온화합물을 만든다. 그 분자와 화합물들이 결합해 자기를 복제하는 유기분자를 형성했다. 단순했던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선택이라는 필연과 유전이라는 우연을 통해 다양한 종으로 진화했다. 그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 종이 탄생했고, 80억 호모사피엔스의 한 개체인 내가 있다. 이보다 더 신기하고 극적이고 장엄한 창조 신화나 탄생 설화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화학이 말했다. '너는 내가 만든 기적이야'
숯과 석탄과 석유에는 탄소가 들었는가. 식물과 동물의 사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물의 몸에는 다 탄소가 있는가? 그렇다. 탄소가 없었으면 생물도 없었다. 탄소는 생물의 몸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얻는 화합물에는 탄소가 있다. 유기화학은 유기화합물을 무기화학은 무기화합물을 연구한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탄소의 존재 여부다.
탄소는 왜 생명의 중심이 되었을까? 과학자들이 찾은 답을 정치학 언어로 번역하면, 탄소는 '유능한 중도'여서 성공했다. 중도는 좌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가끔 치우치는 경우에도 슬쩍 편을 드는 정도에 그칠 뿐 극단으로 가지는 않는다. 열정이 있어도 몰입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녔지만 독선에 빠지지 않는다.
싸움을 먼저 걸진 않아도 누가 싸움을 걸면 피하지 않는다. 무능한 중도는 극단에 휘둘리지만 유능한 중도는 좌우를 통합한다. 탄소는 유능한 중도의 대표 사례다. 사람으로 치면 성격이 온화하고 태도가 유연하다. 남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필요할 때는 원만한 관계를 맺는다. 남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무엇이든 되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 나간다.
철학은 거대한 책 우주에 수학이라는 언어로 씌어 있다. 수학을 모르면 철학을 파악할 수 없다. 갈릴레이가 한 말이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다. 수학 없이는 우주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고 서술하기 어렵다. 큰 성취를 남긴 과학자는 다들 수학을 잘했다.
생물의 몸은 세포의 집합이다. 세포는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분자는 원자의 결합이다. 사람의 몸을 원자 단위로 분해하면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인이 질량의 99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1퍼센트는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 철 등이다. 혈액의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철이 그런 것처럼 이 원소들은 양이 적어도 생명활동에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몸의 원자들은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문과 감성을 입히면 이런 질문이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물리학이 대답한다. '별에서 왔지'
양성자와 중성자는 가까워지면 서로 강하게 당기거나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핵에 욱여넣으면 엄청나게 높은 온도에서 엄청나게 강한 압력을 가해야 한다. 지구에는 그런 일을 할 만큼 온도가 높은 곳이 없고 그 정도로 강한 압력을 만들 방법도 없다. 그러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지구 밖에서 왔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살피다가 별의 생애를 알았다. 별도 태어나고 죽는다. 저마다 주어진 시간이 있다. 절정기에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에너지를 내뿜는다. 짧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기도 하지만 생애의 마지막이 길고 초라한 경우도 있다.
태양이 생애를 마칠 때까지는 지구에 머물러야 한다. 다른 별처럼 태양도 죽는다. 태양은 온도와 압력이 높은 중심부에서 매초 수소 4억 톤을 융합해 헬륨을 만든다. 수소 핵융합이 멈추면 태양은 온도가 내려가면서 자체 중력으로 수축한다. 중심부의 온도와 밀도가 높아지면 헬륨을 융합해 탄소와 산소를 만든다.
중심부의 헬륨을 소진하고 나면 태양은 수축하다가 마지막 핵융합을 일으키며 폭발한다. 열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백색왜성으로 희미하게나마 존재를 알리지만 온기를 완전히 잃으면 흑색왜성으로 우주를 떠돈다. 태양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틀렸다. 태양도 영원하지 않다.
불교는 인격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과 다르다. 우주의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범신론, 자연법칙을 신의 자리에 올려두는 이신론에 가깝다. 석가모니는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그는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를 탐색한 끝에 인간 이성과 자연법칙 말고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한 철학자였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내세워 종교를 만들었다. 범신론과 이신론에 가까운 종교는 다른 종교나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윤리 도덕 강령 중에서 과학적 진리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보편적 진리로 그 자체가 과학이다.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는 어는 쪽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를 결정한다. 둘은 상호의존 관계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어떤 사물도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문장이 있다. 색과 공은 같다. 문제는 색과 공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불교 철학자들은 현상과 실체, 존재와 변화, 물질과 마음, 존재와 무, 물질과 에너지 등 갖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양자역학과 연결하려면 색과 공을 존재와 무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하는 세계는 물질로 꽉 차 있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비어 있는 것 같지만 지구 행성의 모든 공간은 공기로 가득하다. 달과 지구, 지구와 태양, 태양과 다른 별 사이에도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없다. 그렇지만 역도 성립한다. 겉보기는 꽉 찼으나 실제로는 텅 비어 있다.
원자는 왜 안정되어 있을까?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빈 곳을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질은 왜 뒤섞이지 않는가? 힘 때문이다. 세 가지 힘이 텅 빈 원자를 꽉 찬 물질로 보이게 한다. 원자의 구조를 결정하고 원자를 결합해 물질을 형성하는 힘은 핵력과 전자기력이다.
도시의 질서는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에너지를 투입해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기 때문에 무질서한, 고 엔트로피 상태인 것은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건물의 유리창이 깨져 있거나, 도로에 종이상자가 굴러다니거나 등 금방 눈에 띈다. 높은 수준의 질서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도시의 질서는 책임을 맡은 누군가가 강력한 의지로 개입해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 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나는 러셀의 말에 공감한다. 신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