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브랜드를 로컬에서 기획한다는 것 – 매력과 제약 사이에서
지난번 글에서도 썼듯, 이전 회사는 게임 클라이언트 중심의 디지털 마케팅이 주를 이뤘다.
클릭을 유도하는 배너 광고가 대부분이었고, 그 안에서 영상 광고를 직접 기획하거나
브랜드의 장기적 방향을 설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케팅 방향성’이나 ‘컨셉’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서 내려오곤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세부 실행안을 조율하거나 진행 상황을 관리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브랜딩의 본질과 전략적 기획에 대한 갈증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결국 2년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더 넓은 무대와 기획의 전면에 설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이직을 결심했다. 그렇게 이직한 곳은 외국계 광고대행사, 그중에서도 수입차 브랜드의 리드 에이전시로서 기획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입사 후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내가 직접 기획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TVC, 라디오, 매거진 등 레거시 미디어 광고는 물론, 팬덤 마케팅이나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같은 새로운 형식의 캠페인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제로 실행할 수 있었다. 신차 출시를 앞두고는 국내 시장에서 경쟁차종 오너들을 심층적으로 조사해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작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 과정에서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설득력 있는 전략으로 전환하는 과정도 내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되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매일이 도전이자 배움이었다. 아이디어가 기획서 속 문장이 아닌 실제 시장에 나가 소비자 반응을 만드는 순간, 기획자로서의 즐거움과 보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첫 1년은 그렇게 내가 꿈꾸던 ‘제대로 된 기획’을 펼치며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1년쯤 지나자 변화가 찾아왔다. 담당 클라이언트가 바뀌었고,
여전히 수입차 브랜드였지만 이번에는 글로벌 계약 구조 속에서
디지털, 에셋 관리, 소셜 채널, 웹사이트 운영 등이 주 업무가 되었다.
물론 프로젝트 자체는 훌륭했고, 글로벌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국내 시장에 맞게
변형·활용하는 일에도 전략적인 고민이 필요했다. 하지만 창작의 여지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시기 나는 깨달았다.
결과물이 아무리 멋져도, 그것이 내가 기여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공허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특히 나는 로컬에서 직접 제작한 결과물에서 성취감을 크게 느끼던 때였었기에, 글로벌 에셋을 변형하는 방식의 업무가 반복될수록 창작에 대한 갈증이 쌓여갔다.
그 경험은 하나의 확신으로 이어졌다.
“글로벌 브랜드의 국내 마케팅은 아이디어와 실행 모두에서 제약이 많다.”
글로벌 본사에서 이미 정해 놓은 전략과 콘셉트, 그리고 주어진 Asset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로컬의 아이디어가 반영되더라도 그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반대 상황은 어떨까?
국내에 본사가 있어, 우리가 만든 콘텐츠와 캠페인 전략이 해외로 퍼져나가는 구조라면?
로컬에서 만든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 다른 나라에서 활용된다면?
이 발상의 전환은 나의 다음 커리어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외국계 광고대행사에서 글로벌 브랜드를 담당했던 시간은 매력과 제약이 공존하는 경험이었다.
매력: 글로벌 브랜드의 견고한 시스템, 다양한 마케팅 채널 경험, 대규모 캠페인의 스케일
제약: 창작 자율성의 부족, 글로벌 가이드라인이 만드는 한계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의 균형이 완벽하게 맞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경험이 내가 앞으로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획하고 싶은지 방향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로컬이 아닌 글로벌 캠페인 자체를 담당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 무대에서는 또 어떤 매력과 제약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