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교환학생 마무리 일기

생각과는 달랐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by woogeun


어느덧 교환학생이 1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갑자기 아프게 되어 교환학생도 가지 못하고 학기가 꼬여버릴 것 같아 불안에 떨던 게 벌써 5개월 전이네요. 다행히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좋은 공기 마시며 헬스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음식도 규칙적으로 먹다 보니 이때보다 몸이 더 좋을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예요.




솔직히 말하면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안 좋았다는 게 아니라 달랐어요. 오게 되면 여행도 별로 안 다니고 많은 친구들이랑 친해져서 얘기도 많이 하고 정신없이 지낼 것만 같았는데, 정반대로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기 전에 생각해 두었던 목표들은 이루지 못했습니다만, 오히려 더 큰 것들을 얻었습니다. 최근 읽은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의 묘미는 바로 생각지도 못한 것을 얻어온다는 것.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챙겨 오는 게 여행의 맛이라고 말하던 글귀들이 기억납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제 교환학생은.




어느 때보다도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학기를 다니고 있는 중이라 중간에 팀플이나 과제 혹은 타지 생활 중 겪을 수 있는 해프닝들은 있었으나 이런 건 사실 한국에서도 있는 거니까, 비교적 베를린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저에게만 온전히 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혼자 자유롭게 있었던 시간이 과연 있었나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정신없이 입시공부를 하였고,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지요. 대학교 들어가서도 기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군대에 들어갔고 다시 단체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물론 군대에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강한 제약이 있는 곳이라 아무래도 폭이 자유롭지는 않지요. 그러다 제대하고 수험생활로 시간을 정신없이 한 번 더 보냈습니다. 마무리한 뒤에는 인턴을 찾느라 또 정신없이 한 학기를 버티다가 다시 반년을 인턴생활로 보냈습니다.




취업용 자기소개서에서는 빈칸으로 기록될 날짜들이 더 많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오롯이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네요. 홀로 보냈어야 할 시간들을 지금 교환학생에 와서야 몰아서 보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교환학생 오기 전 이유 없이 아팠던 것도 이런 환경을 조성해 주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하며 운명론을 믿어보기도 합니다.




27년을 되짚어보면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왔습니다. 후회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사실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큰 선택들 중에는 후회하는 것 하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턴생활을 하면서 아직 전 제가 바라는 모습에 비해 아직 많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자각했습니다. 일에서의 측면도 있겠지만 제 자신이 완성되지 않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철학도 없고 원칙도 없으니 타인들의 파도에 생각 없이 그저 흘러갔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버릇이 있는지라 한평생 주어진 일들은 잘 해내고는 했지만, 그냥 수동적으로 흘러 다녔다는 걸 인턴생활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흘러가다 보면 선택 때마다 원하는 방향에서 미세하게 틀어지고 결국엔 눈덩이가 되어 먼 미래에는 원치 않는 모습이 될 것만 같은데.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니 정말 끔찍하고 죽어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며 동시에 미래를 그리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나는 누군가... 삶의 목표는 뭐지... 내가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은? 삶에서 우선순위는?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까? 왜 그렇게 행동했었을까?” 이 중 어떤 것들은 브런치에 쓰기도 하고 사적인 건 워드에 기록도 하며 주변 지인들과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지금 교환학생이 1주일 남은 시점에 되돌아보니 생각보다 꽤 많은 일과 고민들이 지나갔고 이를 통해 제 자신이 정말 많이 변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에 차있고 어서 한국에 돌아가 무엇인가라도 할 생각에 너무나도 기분이 좋습니다. 만일 교환학생을 오지 않고 한국에 있었다면 인턴 1~2개를 더해서 스펙상으로는 더 좋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다녀온 지금 저는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스펙도 더 쌓지 못하고 오는 게 아닌가 해서 조바심 내던 게 어제 같은데,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해서 다행입니다.




이곳에서 전 제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저에게 의존할 수 있는 자신감을 기르게 되었고, 둥둥 떠다니기만 했던 나만의 철학이나 추상적인 생각들 및 투자와 같은 학과 공부들도 훨씬 구체화하였습니다. 영어는 잘해진 게 아닌 것 같지만 진심으로 필요하구나의 마음가짐은 얻었고요. SNS에서 여행사진을 보아도 배가 아프지 않을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각 여행지들에서 잊지 못할 추억들도 챙겨 왔고요. 오기 전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그러니까 학과와 관련된 공부들을 더 할 줄 알았는데…. 더 큰 공부를 하고 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가면 정말로 딱 1주일이 남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있겠네요. 플랫 옆 방 친구가 살고 있는 헬싱키에 들러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교환 중이라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준 여자 친구도 만나고, 가족 얼굴도 오랜만에 보고 반가운 친구들도 볼 것 같네요. 하지만 해야 할 일도 산더미입니다. 단골 사장님이 하시는 미용실에 가서 한국식으로 머리도 예쁘게 하고, 눈썹 제모도 다시 하고, 룸메형이 있는 자취방에 돌아가 짐 정리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도 준비 안된 취업준비를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오픽도 봐야 한다는데 큰일이네요. 밀린 브런치 글도 다 써야 하는데…




불안하지만 왠지 저는 다 잘 마무리하고 미래에 원하는 모습으로 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슬슬 베를린에서 하나둘씩 정리해나가야겠네요. 오늘 아침에는 한국으로 택배를 보냈는데, 18kg 되는 박스를 들고 꽤나 많이 걸었더니 벌써 피곤하네요. 갑자기 글을 마치는 것 같지만,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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