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죽아에서 얼죽뜨아로

by 박동욱

영하 17도에도 아아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손끝이 얼어붙어도 빨대는 늘 당당하게 버텼다. “한국인은 시원한 걸 좋아한다”라는 말이 나의 정체성처럼 느껴졌고, 따뜻한 커피는 왠지 양보하는 것만 같았다. 오뎅국물은 뜨겁게 훌훌 들이켜면서도, 커피만큼은 얼음이 사각거려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바람이 선선해지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뜨아 하나요”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 불쑥. 그 순간 내가 오히려 놀랐다. 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안경이 희미해지고, 김 너머로 바리스타가 웃는 얼굴이 보이면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도 변했구나. 장난삼아 스스로 ‘얼죽뜨아’라고 이름을 붙여 봤다. 얼어 죽을 만큼 춥다면 뜨아를 마신다. 생각해보니 꽤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특히 테이크아웃할 때 뜨아는 더없이 든든하다. 손에 쥔 컵이 손난로가 되고, 마음까지 데워준다. 신호 대기 30초, 버스 기다리는 3분도 훨씬 덜 춥게 느껴진다. 컵 뚜껑 틈으로 스며 나오는 고소한 향기가 마스크 안까지 퍼지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내 편처럼 느껴진다. 아이스 커피로는 잘 느껴보지 못한 위로다. 얼음과 나는 서로 너무 쿨해서, 이런 따뜻함이 좀처럼 닿지 않는다.


동생들과 커피를 살 때도 요즘엔 내가 먼저 뜨아를 고른다. “형, 이제 늙었네?”라는 농담이 날아와도,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나이 든 게 아니라, 계절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내 몸과 좀 더 친해진 거라고. 가끔은 솔직히 인정하는 게 훨씬 멋질 때가 있다. 여름엔 아아, 가을과 겨울엔 뜨아. 변덕이 아니라 사계절 정기권을 손에 쥔 기분이다.


뜨아의 매력은 또 있다. 마음이 조급할 때, 천천히 식는 커피를 바라보며 내 마음도 속도를 늦춘다. 뚜껑을 슬쩍 열어 김을 날리고, 입술을 대기 전에 잠깐 숨 고르기. 이 몇 초의 작은 쉼표가 내 하루의 리듬을 바꿔 놓는다. 아아는 언제나 즉시성의 음료였다. 빨대 꽂고 바로 쭉. 그 다급함이 좋을 때도 있지만, 모든 순간이 그렇게 급할 필요는 없더라.


물론 여름은 여전히 아아의 계절이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얼음과 스트레스가 함께 녹아내리는 그 짜릿함, 나도 잘 안다. 다만 이제는 계절이 바뀌면 나의 손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가을이면 종이컵의 미온이, 겨울이면 뚜껑 아래 피어오르는 잔잔한 김이 더 잘 어울린다. 내 취향은 변덕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걸, 커피가 천천히 알려주었다.


가끔 바리스타가 묻는다. “아이스로 드릴까요, 뜨거운 걸로 드릴까요?” 예전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요즘은 대답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오늘 날씨한테 대신 물어봐 주세요.” 사실은 내 몸이 더 빠르게 답한다. 손이 시리면 뜨아, 햇살이 강하면 아아. 그렇게 단순한 기준만으로도 하루가 훨씬 편안해진다.


아마 올겨울은 뜨아와 함께 보낼 것 같다. 장갑 낀 손으로 컵을 조심스레 감싸 쥐고, 흩날리는 입김과 커피 김이 뒤섞인 거리 위를 천천히 걸을 것이다. 얼음이 사각거리던 계절이 다시 돌아오면, 기쁘게 아아를 들이킬 날도 분명 온다. 이제는 무엇 하나에 고집 부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즐길 줄 알게 됐다.


결론은 이렇다. 얼죽아였던 내가 얼죽뜨아가 되었다고 해서 무언가를 포기한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다양하게, 더 넓게 즐길 수 있게 된 거다. 이제 내 ‘취향 사계절제’가 제대로 완성된 셈이다. 컵에 담긴 건 커피지만, 손에 남는 건 온기, 마음에 남는 건 여유다. 오늘도 뜨아 한 잔 들고 겨울 초입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뜨거움이 내 안에서 포근함으로 바뀔 때, 나는 번번이 생각한다. 이렇게 변한 내가, 꽤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