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힘이 안 나는 아침이 있다. 기지개 대신 한숨이 먼저 새어나오고, 머릿속은 멈춘 시계처럼 굼뜨게 돌아간다. 이럴 때 나는 뜨거운 물을 컵에 붓고, 차잎이 천천히 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오늘은 커피의 날카로움 대신, 차의 둥근 온기를 택한다. 김이 피어오르는 동안 마음도 조금씩 풀린다.
우울은 내게 적이라기보다는 계절 같다. 찾아오고, 머물고, 또 지나간다.
그 앞에서 갑옷을 입는 대신 겉옷 한 벌을 더 걸친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조용히 피해가기로 한다.
내가 우울하다는 걸 안다.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길이 보였다.
무엇보다 불면증이 사라진 게 큰 변화다. 밤이 짧아진 만큼, 낮에 서서히 기운을 모을 수 있다. 더 이상 죽음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직 기대할 내일이 남아 있고, 그 기대가 나를 살게 한다.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지만, 그래서 더 천천히 숨을 고른다. 달리기보다는 산책. 폭우 속 질주보다는, 소나기가 그친 뒤 걷는 길.
나는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다만 마음이 뒤늦게 따라올 때가 많다.
그래서 11월부터는 출근 아닌 출근을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촬영하고, 편집한다. 잘 되든 못 되든, 무조건 자리에 앉는다.
성과는 나중 일이다. 루틴은 기대라기보다 약속에 가깝다. 나 자신과 맺는 작은 계약. 그걸 지키고 나면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 달라진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믿을 수 있게 된다. 글쓰기는 여전히 내게 남은 동아줄이다. 말이 막힐 때, 내 손이 먼저 길을 찾기도 한다.
커서가 깜빡이는 하얀 화면 위에 몇 개 단어를 올리다 보면, 바닥 같던 하루에도 얇은 다리가 놓인다.
다리가 흔들릴 수 있지만, 건너가고자 하는 마음이 다리를 튼튼하게 한다.
문장을 다듬으며 호흡이 고르고, 호흡이 고르면 마음이 조금 단단해진다. 거창한 문학이 아니라, 오늘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한 문장. 그 정도면 충분하다.
습관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술 말고 일을 잡고, 누워 있지 말고 앉거나 일어선다.
허리를 세우고 등을 곧게 펴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한 번 들인다.
이 단순한 행동들이 하루의 무게 중심을 조금씩 옮긴다. 우울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울을 인식할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이 바쁨이 자기 착취가 되어선 안 된다. 과하게 몰아붙이는 바쁨은 오히려 우울을 키운다. 감당할 만한 작은 일, 짧은 집중, 자주 쉬는 호흡. 그 리듬이 내 편이 되어준다.
우울을 '없애야 할 것'으로만 보면, 나는 늘 실패하는 기분이 든다. 자연의 섭리에 맞서 이겨보겠다고 이를 악물면, 계절의 그늘은 더 짙어진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방법을 배운다. 물때표를 보듯 마음의 흐름을 바라본다.
가라앉을 때는 무리해 뛰어들지 않고, 차오를 때는 허리까지 잠길 수 있는 지점을 찾는다.
물러설 공간도 남기고, 다시 돌아올 길도 마음속에 새긴다. 그리고 파도가 살짝 잦아들 때, 가장 간단한 일을 하나 해낸다. 컵을 씻거나, 침대를 정리하거나, 한 문장을 쓴다. 그렇게 아주 작은 승리들이 하루를 지탱한다.
현실은 쉴 틈 없이 밀려온다. 돈, 관계, 일, 시간. 이 현실의 이름들을 한 번에 다 해결할 수 없다면, 그저 하나씩 불러본다. '오늘은 글', '오늘은 촬영', '오늘은 편집'. 이름을 부르면 일은 내 앞에 선다.
그리고 내 앞에 선 것 하나만 상대한다.
내일의 큰 산은 내일 만나기로 한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작은 돌 하나만 옮긴다.
그렇게 쌓인 돌들이 결국 벽이 되고, 그 벽이 비바람을 막아준다.
11월 달력을 미리 펼쳐본다. 반복되는 네모 칸이 놀랍게도 마음을 안정시킨다.
빈칸마다 같은 단어를 채운다. '출근'. 결과가 아니라 태도에 체크한다. 체크가 하나씩 쌓일수록 나는 실패자가 아니라 생활자에 가까워진다.
우울의 뿌리는 때로 삶의 무질서에 숨어 있다. 질서가 잡히면 우울은 매달릴 곳을 잃는다. 완벽한 루틴일 필요는 없다. 다 채우지 못한 체크리스트가 오히려 나를 산다.
나는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변하고 있다.
불면증 없는 밤, 차분히 잠들 수 있는 몸, 극단적인 생각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아픈 날은 앞으로도 오겠지만, 이제는 그날의 나에게 건네줄 말이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다시." 이상하게도, 다정함은 의지보다 오래 남는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다정할수록 오래 버틸 수 있다. 우울을 정면으로 이겨내기보다는, 그냥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법을 배운다. 어떨 땐 배를 띄워 건너고, 어떨 땐 발만 물에 담가본다. 또 어느 날은 강가에 앉아 물살만 바라본다. 그렇게 하루가 자란다. 끓는 물도 시간이 지나 식듯, 마음의 온도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식고 나면, 남는 건 투명함이다. 그 투명함으로 세상을 본다. 오늘의 빛과 그늘, 둘 다 자연스럽게 바라본다. 그 두 가지가 모두 내 하루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의 차. 찻잔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창문에는 얇은 물무늬가 맺힌다. 나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고 오늘을 시작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괜찮다.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언젠가 이 계절이 끝나면, 나는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우울이 사라진 자리에 성급한 환희가 아니라, 조용한 생활의 온기가 남아 있을 거라는 걸. 그 온기를 믿는다. 오늘은 그 믿음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