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라는 이름의 ‘특권 여행’or 불필요한 관행

내 시선 속의 이슈

by 박동욱
0005569140_001_20230907123809313.jpg?type=w860 (사진=용인시의회 공무국외출장 보고서)




언론에 또다시 해외연수 논란이 불거지면, 이제 사람들은 놀라움을 지나 분노와 체념 사이를 오가게 된다. 월급명세서를 들여다보며 세금을 확인하는 시민들은 오늘도 지하철 안에서 밀려다닌다. 같은 시간, 누군가는 공항 귀빈실에서 ‘해외연수’라는 이름을 달고 항공권 인증샷을 남긴다. 이런 거리감이 바로 울분의 시작이다.


해외연수라는 말은 원래 설렘보다는 책임감을 떠올리게 해야 한다. 외국의 정책과 제도를 배우고, 그 나라의 성공이나 실패 사례를 분석해서 우리 사회에 무엇을 가져올지 고민하는 게 본래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해외연수는 관광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일정표에는 기관 방문이 한 줄 들어가 있지만, 실제 사진첩에는 맛집이나 쇼핑몰 모습이 가득하다. 돌아와서 제출하는 보고서도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머물곤 한다. 그러니 시민들은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뭘 배우고 온 건가요?”


문제는 목적의 진정성 이전에, 애초 목적이 비어 있다는 데 있다. “해외 모범 사례를 벤치마킹하겠다”는 말은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떠나는지, 그 문제와 연수 일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효과를 확인하겠다는 설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명분만 그럴싸한 출장이 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미 '관광 연수'의 싹이 트이기 시작한다.


예산 문제는 한층 더 적나라하다. 항공료를 높게 잡고, 숙박비도 넉넉하게 책정한 뒤, 일정까지 불필요하게 늘려가며 예산을 다 써버린다. 여행사와 수의계약을 맺고, 몇 번씩 일정을 맡겨 본 단골처럼 가까이서 일정을 짠다. 그러다 보면 이 돈이 누구의 돈인지에 대한 감각도 점점 희미해진다. 하지만 국민은 안다. 그 돈이면 학교 급식의 질을 조금 더 높일 수도 있고, 낡은 복지시설의 난방을 고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점심 한 끼 값도 아까워서 메뉴판 앞에서 오래 망설이는 국민에게, 누군가의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은 그야말로 모욕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바로 투명성이다. 예산 집행 내역은 일부러 복잡하게 쪼개서 보기 어렵게 만들고, 연수 결과 보고서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공개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수사를 의뢰해도, 감사 결과에는 요약된 내용만 전해질 뿐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위반이 있었고,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시민들이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는 모호한 결론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는 익숙한 문장뿐이다. 분노만 쌓일 뿐, 책임지는 얼굴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처벌도 더없이 관대하다. 잘못이 드러나도 ‘주의’나 ‘권고’에 그치는 일이 많다. 예산을 부당하게 썼어도 개인이 돈을 돌려주거나, 실질적인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경우는 드물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만 반복될 뿐, 해외 공항 앞에서 사진 찍는 모습도 여전히 반복된다. 솜방망이 처벌은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관행을 안전하게 지키는 장벽처럼 작동한다.


여럿이 함께 떠나는 단체 연수라는 형식도 문제를 키운다. 여러 의원이 함께 가면, 서로를 감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패마저 되어준다. “다 같이 가는데 뭐 어때”라는 인식이 “다 같이 즐기자”로, 그리고 결국엔 “다 같이 입을 맞추자”로 바뀐다. 누군가 문제를 지적하려고 해도, 머릿속에는 다음 선거, 다음 상임위, 다음 의제에서 다시 마주칠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내부 견제는 사라지고,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만 남는다.


결국, 질문은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많은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걸까?


첫째, 해외연수는 특권 의식을 드러내기 가장 쉬운 무대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늘 그 권한을 누리고 싶어 한다. 해외연수는 이런 욕망을 ‘학습’과 ‘연구’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쉽게 숨길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둘째, 책임 구조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예산을 편성하고, 그 예산의 혜택을 받는 사람이 사실상 같은 집단일 때, 견제는 쉽게 무너진다. 외부에서 감시가 들어와도, 명단이나 세부 내역이 흐릿하면 분노는 한순간 치솟다가 이내 허탈감과 체념으로 사그라진다.


셋째, 결국 시민들의 피로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수많은 비리를 봐왔고, 그때마다 분노해왔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바쁜 삶 앞에서는 그 분노도 곧 생계를 위해 접을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이 피로를 알고, 또 그것에 기대어 ‘이번에도 좀 지나면 다 잊혀지겠지’ 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런 냉정한 계산이 결국 관행을 지키는 버팀목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


해외연수 자체를 아예 없애라는 극단적 주장보다 먼저, 최소한의 상식부터 요구해야 한다.

연수의 목적, 일정, 참여자 명단, 예산 집행 내역, 결과 보고서까지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누구나 인터넷 검색만으로 작성할 수 있는 형식적인 보고서가 제출된다면, 그 예산은 당연히 개인이 부담하도록 환수해야 한다.

형식적인 사과가 아니라, 실제로 정치인에게 뼈아플 처벌

예를 들면 공천에서의 불이익이나 직책 박탈 같은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


“세금은 공짜 돈이 아니다.”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민망한 이 한마디가, 여전히 정치권을 향한 가장 절실한 외침이라는 것이 씁쓸하다.


국민은 더 이상 ‘해외연수 인증샷’ 같은 걸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국민이 정말 보고 싶은 건 일상의 현장, 정책의 현장에서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의 얼굴이다.

사라지지 않는 이런 부조리한 관행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 관행에서 이익을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침묵으로 그 붕괴를 방조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시민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해외연수, 다녀올 수 있다. 다만 그 한 장짜리 항공권보다 내 한 달치 교통비가 더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말고 다녀오라.”

그리고 돌아온 뒤에는, 그 연수가 정말 ‘공부’였는지, 아니면 그냥 ‘관광’이었는지 끝까지 따져 묻는 것이다.

분노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오래된 관행은 절대로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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