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선 의 이슈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이 또다시 공개됐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장면은, 마치 ‘국가 공포 특별전’을 보는 듯하다. 이름과 주소, 체납액까지 줄줄이 공개되지만, 결국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숫자는 매번 늘고, 사람들은 잠깐 분노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잊는다. 그 사이 많은 체납자들은 '버티면 이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올해만 봐도 그 규모가 만만치 않다. 행정안전부와 지방정부가 발표한 지방세·부과금 고액 상습 체납자는 1만621명으로, 지난해보다 3.4% 증가했다. 기준은 1,000만 원 이상 세금을 1년 넘게 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세종시는 홀로 372명, 175억 원에 달하는 체납액 명단을 공개했다. 관세청이 별도로 공개한 관세 고액 상습 체납자는 236명인데, 이들이 밀린 금액만 1조 3,362억 원에 달한다. 숫자만 보면 국가가 사활을 걸고 대응하는 듯하지만, 사실을 좀 더 들여다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최근 5년 사이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서 빠진 사람은 4만718명이다. 이 가운데 3만6,530명, 즉 거의 90%가 세금 부과 시효 만료로 명단에서 제외됐다. 실제로 세금을 납부해 명단에서 빠진 사람은 1,948명, 4.8%에 불과하다. 시효가 끝나 그냥 사라진 세금만 5년간 8조 5,343억 원이다. 쉽게 말해, '안 내고 버틴 사람'이 '내고 해결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얘기다.
명단 공개 제도는 2000년대 초, “악의적인 체납은 원조교제보다 죄질이 나쁘다”는 국회 발언까지 나오면서 도입됐다.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문화가 자리잡길 바라는 취지였다. 이후 정부와 지자체는 이름 공개, 출국 금지, 공공정보 등록 등 여러 장치를 도입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전문가들은 “이제 문제는 실효성”이라고 말한다.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건, 오히려 엉뚱한 메시지를 사회에 남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로소득자는 월급에서 바로 세금이 빠져나가고, 자영업자들도 세무조사를 한 번만 받아도 세금 달력에 예민해진다. 반면 수십억, 수백억을 체납한 일부 부유층은 변호사와 세무사를 내세워 자산을 여기저기 분산시킨다. 상속으로 부를 물려받으면서도 세금을 회피한다는 비판이 반복해서 나온다. ‘세금은 의무다’라는 당연한 말이, 이들에게는 ‘내도 되고 안 내도 되는 선택’처럼 들리기 십상이다.
더 심각한 건, 국가 스스로 기준선을 점점 낮추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였던 주병기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종합소득세와 재산세를 여러 차례 미납했고, 지방세와 과태료도 상습적으로 밀려 재산이 압류당하기까지 했다. 그마저도 인사청문회가 다가와서야 급하게 밀린 세금을 납부했다. 그런데도 이런 전력이 공정과 경쟁을 책임질 자리의 결정적 탈락 사유가 되지는 않았다. 국민에게는 “세금 잘 내라”고 하면서, 권력자의 세금 체납에는 “좀 밀려도 괜찮다”며 눈 감아주는 셈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회는 결국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다.
돈이 크거나, 권력이 있으면, 세금은 선택이 되고
월급쟁이와 영세 자영업자에겐 선택권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이중 메시지가 고액 상습 체납에 대한 사회의 ‘관대함’을 만든다.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엄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효라는 루트가 뒷문처럼 열려 있다. 고액 체납자는 시간만 벌면 된다. 국가는 명단을 공개해 잠시 분노를 달랠 뿐이다. 포털에 이름이 오르고 몇 주만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도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남는 것은 구멍 난 재정과 허탈감뿐이다.
물론 인권과 개인정보 보호도 중요하다. 사업 실패나 질병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이들을 지나치게 몰아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논쟁의 핵심은 그런 회색지대가 아니다. 상속과 증여를 받으면서도 세금을 일부러 미루거나, 수년씩 체납을 거듭하며 호화생활을 이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마저 공직에 앉힐 수 있다면, 명단 공개는 그냥 보여주기 식 행정에 불과하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한 문장에 담을 수 있다.
“세금을 안 내도 되는 나라에서, 공정은 그저 구호일 뿐이다.”
고액 상습 체납자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악의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시효가 아니라 끝까지 추적해 책임을 묻는 것이 맞습니다. 재산을 숨기는 수법을 잡아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시효 규정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합니다. 둘째, 고액 체납 경력이 있으면 고위 공직이나 공공기관 주요 보직에서 사실상 퇴출될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금을 성실하게 낸 사람이 손해 보지 않게 하겠다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부터 확실히 지켜야 합니다.
세금 문제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신뢰의 문제입니다. 만약 국가가 고액 체납자들에게 “버티면 결국 이긴다”는 잘못된 교훈을 주기만 한다면, 성실하게 세금을 내온 사람들은 언젠가 이런 질문을 할 겁니다.
“내가 왜 바보처럼 꼬박꼬박 내고 있지?”
이런 의문이 점점 커지는 사회에서 법과 제도가 힘을 잃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필요한 건 또 한 번의 명단 공개가 아닙니다. 세금을 내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는, 이제는 관대함과 결별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분명한 의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