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뜻하지 않는 옛 노래

by BOX book

상기이미지는 AI로 생성한 결과물이다.


양파 1집

뜨거운 공기가 온몸을 휘감던 90년대의 어느 여름날이 떠오른다. 더위를 피해 잠시 나선 산책길, 허리춤에 '마이마이'를 차고 세상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생경했던 그 시절. 가수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을 목청껏 따라 부르며 지나가던 그날의 풍경이 불현듯 내 앞에 서 있다.

스마트폰 화면 위로 흐르는 90년대의 멜로디, S.E.S의 노래 한 소절에 첫사랑의 비누 냄새가 나고, 낡은 사진의 까칠한 촉감이 손끝에 되살아난다. 이 모든 감각이 오늘의 나를 감싸 안아준다.


가시지 않을 것 같던 더위가 어느새 차가운 밤바람으로 변한 제주의 테라스. 달빛이 내려앉은 바다를 바라보며 전자담배를 입에 문다. "담배는 역시 'THIS'지."라며 호기롭게 외치던 시절의 나는 이제 없고 아이들에게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 전자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아빠만이 있을 뿐이다.

친구들의 칭찬에 어깨가 들썩이며 노래방에서 이원진의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열창하던 그 시절. 왠지 모를 씁쓸함과 그리움이 섞인, 먼지 쌓인 추억들을 하나둘 꺼내어 본다.

S.E.S 그룹

H.O.T 로고가 새겨진 명함에 집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 적어, 한껏 멋을 부리고 나갔던 어린이대공원의 '반팅'. S.E.S의 유진을 닮았던 그 소녀에게 자신감 있게 명함을 건넸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던 순간들. 친구들끼리 농담 따먹기 하며 웃어넘겼던 그 거절은 상처조차 되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지금의 나에겐, 차마 꺼내어 더럽히고 싶지 않은 순백의 기억들이다.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학창 시절의 친구들, 일본으로 유학 간 뒤 소식이 끊긴 녀석, 그리고 오래되어 삭아버린 수많은 인연들. 잃어버리고, 또 잊어버리며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 시간의 속도가 온몸을 휘감는다.


살아왔던 날들을 기억하고, 살아갈 날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지만, 2025년 10월 2일 밤 12시 1분, 현재의 나는 솔직히 힘에 부친다. 철없던 시절의 꿈을 놓지 못해 여전히 철들기를 거부했던 나였는데. 가족과 사회, 그리고 혼자라는 쓸쓸함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이라는 거대한 관습의 물결에 몸을 맡긴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고 그토록 혐오했던 '속물'이라는 단어를 이제는 나 자신에게 되뇌며 돈을 좇고 있다. "가족을 위해서다, 아이들을 위해서다." 주문처럼 반복이며 합리화하는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나를 바라보고 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즐겨라." 군대 시절, 동기들이 쉴 때 홀로 대걸레를 잡고 웃어 보이던 그 병장의 말이 뼈에 사무쳐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명하고 싶었고, '솔선수범'이 나의 행동의 태가 되었다. 나이가 적든 많든, 직급이 높든 낮든 전혀 생각하지 않고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 같지 않았고 나의 성실함을 이용하고 뒷짐 지고 바라보는 사람들. "열심히 살면 성공하겠지."라는 단순하고 평범한 믿음은, 돈을 좇아 만난 사람들 앞에서 무참히 깨졌다. "아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다." 한숨 같은 넋두리를 뱉으며 쓰디쓴 인생의 고배를 들이켠다.


"노력은 배신할 수 없다. 열심히 한 면 안 되는 건 없다. 말에 놀아나지 말고 행동하는 내가 되자." 다짐해 보지만, 정작 남들도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짧고 무지한 신념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한다.


나는 지금 비싼 수업료를 내며 인생을 배우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충돌하는 이 새벽의 시간 틈 사이. 무지렁이 같은 자책 속에 옛 기억을 안주 삼아, 흔들리는 마음을 글로 적어 내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