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을왕리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은 쉬어가라 할 때가 있다. 잘 가던 길에서 갑자기 벗어날 수도 있고, 안 보이던 길이 갑자기 ‘짠’하고 나타날 수도 있다. 어쩌면 삶은 우연과 요행이 겹쳐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정표일 뿐이다. 그나마 없다면 나아갈 길도, 잃어버릴 길도 없을 테니까.
가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떠오른다. 의미 그대로 행운과 불행은 공평할지도 모른다. 모든 깨달음은 실전에서 나온다. 얼핏 떠오른 기억 하나.
회사 대표와의 갈등으로 나름 요직에서 비교적 한직(?)으로 옮겨 갔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밀려났다고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자리가 집과 가까워 오히려 잘됐다는 마음이 컸다. 중앙에서 벗어나고 나니 사내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갈등에 얽힐 일이 없었다. 본사 내부는 요동쳤지만, 상관없는 일처럼 지나갔다. 그해 늦가을 어머니께서 소천하셨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머니와의 시간을 그처럼 살뜰하게 보낼 순 없었을 것이다. 다음 해 봄 다시 불려 가 중요한 보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본사 내부의 복잡한 문제들이 얼추 정리되어 가던 때였다. 살면서 경험한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은 때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걸음을 멈추게 되었을 때, 피곤한 삶에 쉼표 한 번 찍는다고 생각하면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퇴직을 코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뭔가 배우고 있지만, 이 길이 맞을까? 뭐 그런저런 고민이다.
어느 해 여름, 회사의 하계 휴양 프로그램에 당첨되어 인천 을왕리의 한 리조트에 묵을 기회가 있었다. 딱히 뭔가를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저 한 사흘 쉬었다 오자는 생각이었다. 해변을 점령한 조개구이 집들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는 동네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여름비까지 내려 외출을 막았다. 진짜 볼거리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비가 그친 하늘은 구름을 뚫고 햇살로 멋진 빛내림을 만들었다. 빛과 윤슬이 만드는 그림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명승지를 찾아가는 노력 없이도, 자연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고개를 숙이니 바닷물이 밀려난 개펄 모래톱에 살포시 내려앉은 어선이 보였다. 커다란 바위 뒤에 터를 잡은 모습이 고단한 일상을 내려놓고 쉬는 듯 보였다. 거친 바다에서 힘들었을 어선의 모습이 너무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쉼이 마침표가 될지, 쉼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침표는 대부분 다음 여정의 쉼표가 되어 준다. 돌이켜보면 삶이 그랬다. 고민 많은 지금이지만, 그렇게 믿고 힘을 내보려 한다. 까짓거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지. 을왕리의 짧은 기억이 만든 두서없는 자기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