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며느리밥풀
세상 변하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익숙해져 살다 보니, 당연한 듯 느껴지는 많은 물건이 얼마 전까지도 없었던 신문물들이다. 핸드폰이 등장한 때가 1990년대 중반 즈음이고, 스마트폰의 등장은 2010년 전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PC라는 물건을 만났던 때가 1980년대 초중반 즈음이었다. 그때는 테이프 녹음기를 기억장치로 썼었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넣어 DOS로 구동하던 컴퓨터는 1980년대 후반에 만났다.
IT 기술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라 과거사를 더듬어 봤지만, 사회 변화도 엄청나게 빨라졌고 문화와 가치 인식 역시 크게 달라졌다. 과거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상이 지금은 그렇지 않아 진 것도 많다.
그동안 변하는 세상에 어찌어찌 편승해 잘 버티고 있다가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편하고 풍요로워진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일까?’ 하는, 약간 복에 겨운 투정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인생 최고의 가치는 돈이 되었고, 그만큼 주변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부족해졌다.
돌이켜보면 어느 시대나 사람 사는 세상이 비슷하긴 했다. 우리 중 일부가 그리워하는 과거 역시 험난한 시대였다. 갈등과 모순은 어느 시대나 충만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지금과 다른 그 시대의 한 부분, 그것이 문화든 가치든 뭐든, 그런 것과 비교해서 부리는 투정일 수도 있다. 그러니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른 것도 아니다. 단지 삶의 경험이 다를 뿐이다.
누구나 다 알 듯한 뻔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게 만든 장본인은 ‘수염며느리밥풀’이다. 꽃의 모양보다는 그 이름 탓이다. 이름에 ‘며느리’가 들어가는 식물은 마디풀과의 ‘며느리밑씻개’와 ‘며느리배꼽’ 그리고 현삼과의 ‘며느리밥풀’들이 있다. 며느리밥풀은 몇 종이 있지만, 대부분 모양이 비슷하다.
이름에 며느리가 들어간 식물들 대부분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담고 있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고 시어머니는 갑(甲)이었고, 며느리는 을(乙)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모르겠다. 가부장 제도를 탓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이유는 아닌 듯하다. 가난을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지만, 고부갈등은 사회적 지위나 빈부와도 상관이 없었다.
요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갑을관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렇다고 그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최대한 안 보고 사는 정도랄까. 표현이 너무 지나쳤나 싶기도 하다. 어디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니까.
며느리밥풀의 꽃을 보면 붉은 입술에 흰 밥알 두 개를 얹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며느리의 입술에 묻은 밥알로,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의 슬픔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며느리밥풀의 꽃말은 ‘여인의 한’, ‘질투’, ‘원망’ 등이다.
관계는 다르지만, 세상은 여전히 다툼으로 가득하다. 타협은 없다. 이긴 사람이 모든 걸 차지하는, ‘승자독식’은 절대 질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잘못에 대한 인정이나 사과도 하면 안 된다. 그 순간 졌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며느리밥풀은 반기생식물이다. 저 혼자 온전히 설 수 없어 누군가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의미다. 보기에 따라 연약함일 수도 있지만, 누구나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혼자 사는 듯 보여도 우리에게는 사방으로 연결된 끈이 있다. 그 끈을 통해 서로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숲에 있는 많은 식물이 홀로 살아가는 듯 보여도, 이들은 뿌리와 균근을 통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 부른다. 심지어 잎들도 골고루 햇볕을 받도록 서로 배려한다. 공생을 선택한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먼저 태어나 세상을 만든 선배의 위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