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장나무
색도 없고 냄새도 없다. 이른바 ‘무색무취’(無色無臭)다. 사전에는 ‘허물이 없이 깨끗하고 공정함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라 풀이하고 있다. 좋은 말 같은데, 사람이라면 정나미가 떨어질 듯싶다. 세상에 냄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색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요즘은 색도 냄새도 넘쳐난다.
모두가 자신을 내세우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시대다. 과거에는 제한된 매체에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만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매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지금은 수단과 방법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 기존 매체들의 절대적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영향력이 줄어들어서일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일하는 방식도 옛적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어쩌면 전문성보다 화제성이 더 중요해진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글을 잘 쓴들 특별히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이야기를 물어와도 제목 한 줄 그럴싸하면 됐지. 내용 좀 빈약한 게 대수냐는 식의 사고가 만연해 보인다. 전문성보다는 화제성이 우선인 자극적인 세상이 됐다는 이야기다. 더 강한 ‘유색유취’(乳色有臭)가 생존의 중요한 덕목이 된 것이다.
식물 세상도 만만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많은 식물이 특유의 향과 색을 가지고 있다. 잎이야 대부분 녹색이라 구분이 쉽지 않지만, 꽃은 제각기 개성을 가지고 있다. 식물 역시 평범하면 살아가기 힘든 탓이다. 식물 대다수가 더불어 살아가는 곤충 하나쯤 데리고 있다. 꽃의 모양은 식물이 선택한 특정한 곤충을 위해 설계됐다. 색은 곤충을 유도하는 관제탑 또는 등대와 같고, 심지어 곤충의 눈에만 보이는 착륙장까지 표시되어 있다. 향은 곤충을 부르는 관제탑의 전파 또는 등대의 불빛과 같다.
식물이 이렇게 공들여 꽃에 향과 색을 입혀 곤충을 유혹하는 이유는 생존, 즉 번식을 위해서다. 그저 그렇게 평범해서는 후손을 남길 수 없기에, 오랜 세월 갈고 닦고 조정해가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누리장나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평범한 야산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이 식물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선택을 받고 있지는 않다. 한마디로 셀럽이 되지 못한 식물이다. 어쩌면 냄새 탓이거나, 숲에 가려 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숲에서 그의 존재가 무시되진 않는다.
식물이 공들여 만든 모습을 사람들은 쉽게 판단한다. 꽃이 크고 화려하면 좋은 식물이고, 작고 초라해 보이면 잡초쯤으로 여긴다. 식물의 입장에서 사람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만 식물에 대한 자신들의 미적 관점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거다.
누리장나무는 예쁜 꽃과 열매를 가졌다. 한여름 숲에서 흰색 꽃을 피우고, 가을에 빨간 꽃받침에 검푸른 둥근 열매를 맺는다. 다만 사람의 관점에서 그리 좋아할 만한 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누릿한 냄새가 난다고 ‘누리’, 작대기 또는 막대기라는 뜻의 ‘장나무’가 더해져 ‘누리장나무’가 되었다.
보통은 각각의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 곤충의 ‘기주식물’이라고 한다. 가령 산초나무, 탱자나무 등은 호랑나비과의 나비들이, 유채, 배추 등은 흰나비과의 나비들이 애벌레 시절 먹이로 삼고 자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누리장나무를 먹이식물로 삼고 있는 곤충은 없는 듯하다. 다만 화려한 꽃에 유혹되어 나비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장소 역할은 하고 있다.
누리장나무 정도면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 하나쯤 있을 법하다. 냄새에 얽힌 이야기이다. 우연히 마주친 양반집 처녀를 짝사랑하던 백정 아들의 애틋한 연모가 누리장나무의 향기에 담겨 있다. 결국 죽어서야 함께 하게 되고, 애틋한 연민이 자라 나무로, 피어난 꽃에서 백정에게서 나던 냄새와 닮은 향이 났다는, 슬픈지만 존재감 확실한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누리장나무의 꽃말은 ‘친애’와 ‘깨끗한 사랑’이다.
흔하게 우리가 ‘평범’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평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살이 속, 여러 생각하기 싫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기에 평범이란 말이 생겨난 건 아닐까. 누구나 특별한 향기와 색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 더 돋보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평범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범함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