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매화말발도리

by 이우형


다름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제각기 살아온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방식이 고정되어 가치로 자리 잡으면 진리 혹은 정의가 된다. 세계화는 이 가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서구의 가치가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며 문명과 야만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강하고 부유한 세력이 문명이고, 약하고 가난한 세력이 야만이라는 공식은 약육강식과 다름이 없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그의 저서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문화는 우열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문화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생존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격하게 동의한다. 문화를 우열의 이분법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다름으로 이해한다면, 지금의 많은 갈등은 상당히 줄어들었을 테니까.

숲도 다르지 않다. 숲의 나무와 풀들은 햇빛을 두고 경쟁한다. 나무들이 키를 키우는 이유는 단 하나, 햇빛이다. 나무의 생존은 광합성에 달려 있다. 빛을 받아 영양분을 만들고, 이를 통해 꽃 피우고 열매 맺어 대를 이어 나가는 게 식물의 생존 목표다.

햇빛이 잘 들고 영양이 풍부한 땅은 경쟁이 심하다. 이미 큰 나무들이 자리 잡고 자라기 시작하면 키 작은 나무나 풀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숲에서 만나는 다양한 식물들은 모두 그들만의 방식을 찾아 생존한 ‘승리자’들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게 저런 곳에서 자라지?’ 싶은 곳도 그들에게는 살기 ‘딱’ 좋은 장소다. 우리가 의아하게 볼 뿐이다.

매화말발도리는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내려 산다. 매화말발도리는 흔히 관목(灌木)이라 불리는 키 작은 나무에 속한다. 키는 겨우 1m 남짓 정도다. 이 키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삶의 터전이 바위틈이다. 바위는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고 햇빛을 더 받을 수 있어, 적응만 한다면 최고의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매화말발도리는 씨앗을 받아 파종하면 비옥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그 말인즉 살기 좋은 곳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처음 사용한 이 말은 원래 인간 사회의 생존경쟁 원리를 설명한 사회학 용어였으나, 생태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의미인즉, ‘살아남은 자가 적자’란 뜻이다. 요즘 말하는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와 같은 의미다. 흔히 알고 있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숲에서 보는 모든 생명은 모두 이 적자생존의 결과물들이다. 외모나 사는 곳을 보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숲에는 경쟁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협력도 있다. 우리가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무는 가만히 서서 많은 일을 한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협력한다. 서로 햇빛을 고루 나눌 수 있도록 잎을 어긋나게 하거나, 아예 나무들끼리 서로의 잎이 영역을 나눠 갖기도 한다. 해충이 오면 연락망이 가동되고, 땅속에서는 뿌리와 균류를 통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운영한다. 키 큰 나무들은 가끔 자라면서 자신의 우듬지에 경계를 만들어 하늘에 틈을 낸다. 이를 ‘수관기피’(樹冠忌避)라고 한다. 이 틈으로 햇빛이 내려와 숲의 키 작은 식물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고요하게 생각하는 숲은 이처럼 많은 경쟁과 협력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숲 속의 생명들은 삶을 허투루 살지 않는다. 환경은 그들이 적응하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용해야 할 터전일 뿐이다.

바위틈에서 신선처럼 살아가고 있는 매화말발도리의 꽃말은 어울리지 않게 ‘애교’다. 말발도리는 강원도 방언으로 열매가 말의 발(말굽)을 닮아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에 꽃이 매화를 닮아 매화말발도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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