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죽림동성당 예수성심상
변칙이 원칙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가끔은, 정말 가끔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이, 아마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변할 수 있는 원칙은, 사실 원칙이 아니었을 수 있다. 편의상 정해 놓은 그 시대의 규범 정도랄까.
우리는 원칙이라며 불변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원칙의 가지 수는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다양하게 많은 원칙은, 원칙이라기보다 규칙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규칙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사회 질서를 위해 만들어 지키고 있는 법이 시대에 따라 개정을 거듭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원칙은 근본 가치에 가깝다. 함축적 의미이며, 가장 기본이 되는 선(善)이다. 규칙은 이 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행동강령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행동강령에 얽혀서 근본 가치인 선을 무시하곤 한다.
다시 성탄절이 다가왔다. 예전 같지 않지만,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로 성탄절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다. 성탄절은 모두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의미는 ‘죄’에서의 ‘구원’과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예수 탄생 이전에 유대인들은 지켜야 할 율법이 산더미 같았다. 예수는 이 지키기 어렵고 복잡한 구원의 매뉴얼을 ‘믿음’과 ‘사랑’으로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은 다시 믿음과 사랑이라는 가치 대신 복잡한 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마도 바른길을 가기 위한 기본적인 행동강령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행동강령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되고, 급기야 어겨서는 안 되는 원칙이 되었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가?
개인적인 생각에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옆을 보거나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본다. 교회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믿음을 키우고 확장하며 실천하는 장소다. 교회 자체가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몇 해 전, 꼭 이맘때 춘천을 방문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어딘가를 찾아가겠다는 목적도 없었다. 며칠의 말미가 있었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걸음 중에 만난 장소가 죽림동성당이었다. 성당이 있는 언덕 위, 양팔을 벌리고 세상을 축복하는 예수성심상은 그렇게 만났다.
예수성심상 뒤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수선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축복은 꼭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왠지 예수님의 축복보다 교회의 권세가 더 크게 느껴졌다.
요즘 세상을 보면 종교가 세상에 평화를 주는 게 아니라 혼란을 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상사에 뛰어드는 이유가 평화를 위한 것인지 사람의 욕심을 위한 것인지 돌이켜 볼 일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이익이나 도모하는 사람들을 주께서 결코 온전하게 보지 않으실 터이다.
교회도 믿음의 사람들도 2,000년 전 예수께서 오실 때의 초심을 되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누가복음 2장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