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바람꽃
봄꽃들은 참 부지런하다. 응달에 눈이 남아 있고, 계곡에는 얼음이 미처 물러나지 못했는데, 뭐가 급한지 봄꽃들은 기지개를 켠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은 식물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운 겨울 끝자락에 떨며 꽃을 피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경쟁이 적으면 기회가 그만큼 많아진다. 부지런의 이유다.
2007년 2월이 끝날 무렵, ‘변산바람꽃’의 이름이 시작된 변산을 찾았다. 그것도 처음 발견된(?) 곳으로 갔다. 조그마한 시골 마을 곳곳에 변산바람꽃을 보려는 사람들이 제법 와있었다. 담장이 없는 한 농가 서까래 아래 변산바람꽃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툇마루에 앉아서 사진기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하셨다. 내친김에 변산바람꽃을 뭐라 부르시냐고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땅꽃”이라 부른다며, “이전부터 많이 있었다”고 하셨다.
변산바람꽃은 선병윤 박사(전북대)가 명명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서 살아오던 식물이 뒤늦게 제 이름을 찾은 셈이다. 자료에 따르면 그동안 ‘너도바람꽃’과 같은 종으로 인식되어 오다가 1993년 선병윤 박사에 의해 새로운 이름표를 달았다고 한다.
지금은 변산바람꽃 자생지가 많이 발견되어, 매년 2월 말쯤 되면 SNS를 비롯한 각종 온라인 매체에 변산바람꽃의 모습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라온다.
변산을 다녀오고 나서 이틀 정도 지나 경기도의 한 자생지를 찾았다. 도심과 인접해 있는 이 자생지는 등산을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2007년 당시만 해도 변산 바람꽃을 보려고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변산바람꽃을 만나는 기쁨은 상당했다. 2014년 다시 찾은 자생지는 꽃이 거의 없었다. 대신 진입로에 데크가 설치되고, 자생지를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계곡을 따라가 보니 겨우 숨 붙어 있는 한 송이를 놓고 몇 명이 줄 서서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한숨이 나왔다. 그 발걸음 중, 손 타지 않은 두 송이를 만났다. 누가 볼세라 조심스레 몇 장 찍고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이보다 앞서 2005년 4월 초 안산시 소재 풍도를 방문했다. 안산에 속한 섬인데 가는 길은 엉뚱했다. 안산이나 화성이 아닌, 당진항에서 배를 빌려 들어갔다. 섬에 들어가니 능선 하나가 온통 꽃으로 가득했다. 변산바람꽃을 처음 만난 곳이 여기였다. 그런데 이곳의 변산바람꽃은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 이름은 ‘풍도바람꽃’이다. 풍도바람꽃을 명명한 사람은 오병운 박사(충북대)다. 새로운 이름을 얻은 시기는 2009년,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재된 것은 2011년이다. 정식으로 다른 종이 됐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두 바람꽃의 사진을 놓고 어떻게 다른지 계속 보고 있지만, 솔직히 구분이 어렵다. 물론 꽃잎으로 위장한 꽃받침의 수, 꽃술인가 싶은 깔때기 형태의 꽃잎 모양과 색 등등, 몇 가지 특이점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을 보면서 다시 사진을 봐도 잘 모르겠다. 반면, 너도바람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꽃술 옆을 둘러선 꽃잎의 모양이 변산바람꽃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바람꽃은 서양에서 ‘아네모네’(Anemone)로 불린다. 그리스 신화 속 바람꽃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미소년 ‘아도니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죽임을 당한 뒤, 그가 흘린 피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바람꽃이다. 변산바람꽃과 풍도바람꽃은 아네모네 대신 ‘에란티스’(Eranthis)라는 속명을 가졌다. 어원의 의미는 ‘봄꽃’이다. 아네모네 역시 그리스어에서 유래됐고, 어원의 의미는 ‘바람’이다.
변산바람꽃과 풍도바람꽃은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비교적 최근에 이름을 얻은 꽃이라 정식으로 부여된 꽃말은 없다고 한다. 다만, 매우 이른 봄 꽃을 피우다 보니 희망, 기다림, 봄의 전령, 새로운 시작 등의 의미로 불리고 있기는 하다.
어쩌다 야생화 사진을 촬영하게 되면서 늘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무지한 탓이다. 그래도 세월이 있다 보니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어 근근이 아는 척하고는 있지만, 근본이 어디 가겠는가. 제대로 공부해 보고픈 욕심도 있으나, 막상 잡으려 하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이른 봄 들려오는 반가운 소식에 옛일 뒤적여 다시 끄집어내 봤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속절없는 겨울이다. 봄이 오기는 온 건가 싶다.
■바람꽃들 비교(변산, 풍도, 너도)
■참고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국립수목원.
·검색 도우미 : ChatGPT, 네이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