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이마골로기(imaglogy)
이미지를 뜻하는 Image와 이념을 뜻하는 이데올로기 Ideology의 합성어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만든 단어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논리적인 체계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이미지에 지배받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표현하는 용어가 이마골로기(imaglogy)이다.
1994년 출간된 <이마골로기, 미디어 철학(Imagologies. Media Philosophy)>에서 마크 타일러(Mark C. Taylor)와 이사 사리넨(Esa Saarinen)은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사랑은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랑의 얼굴을 모른 채 전보다 만족스러운 새 출발을 기대하며 사랑을 끊임없이 이상화하고, 재활용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랑에 빠진 이들은 영원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공중에 붕 뜬 상태’로 남는다.
‘공중에 붕 뜬 상태’라는 표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용한 표현이다. 교황은 웹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근본 없는 사회에 좌지우지되면서, 갈수록 뿌리내릴 기회를 잃고 ‘공중에 붕 뜬 상태’에 있다고 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애초에 논리적인 이념이나 신념보다는 이마골로기의 개념으로 훨씬 더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현대인에게 이데올로기란 개인의 도피처이자 자아 정체성을 의탁하는 곳이기도 하니까.
일련의 이미지와 암시적 상징의 연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상 체계가 있을까?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도 나오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될수록 하나의 주장은 단순화되고, 납작해지고, 단편적인 왜곡으로 남기 쉽다.
군중이 중립적이라 가정하더라도 거의 언제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암시를 받으면 쉽게 넘어간다. 첫 암시가 돌발적으로 또렷이 주어지면 군중 모두의 뇌에 즉시 전염되어 심기고, 곧바로 방향까지 결정된다. _<군중심리>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사상체계(이데올로기)는 이마골로기와 거의 구분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개념을 이해할 때 쉬이 단편적 이미지 하나로 압축해 버리곤 한다.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쉽게 그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는커녕 지퍼 하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파인만이 지적했듯 일상 속에서 지퍼를 수없이 사용하면서도 지퍼가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퍼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개념과 체계를 안다고 생각한다. 바로그 납작한 이미지의 왜곡을 떠올리며.
우리는 지퍼를 이용하듯 많은 이데올로기를 이용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지퍼하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듯 이데올로기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이마골로기로 변해버린 사상이 아닐까? 진정한 페미니즘의 의미와 정당성이 이마골로기로 인해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의견을 자주 들었다. 이런 식이다. “요즘 페미들은 옛날과는 달리 끔찍해!” 모든 사상에는 그 나름의 의의가 있지만 사람들의 투사로 인해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또한 진정한 한국인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와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학문적으로 명확한 기준과 평가척도가 없는 것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이조차 특정 사상에 그럴듯한 이미지를 투사하는 이마골로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넌 남혐을 하니까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페미니스트란게 뭘까? 페미니스트는 성차별을 끝내겠다는 이상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한”이라는 말을 어떤 대상의 앞에 붙임으로써 이념주의자에게 완벽한 사상과 사고를 가진 천사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까?
어릴 때 “학생답지 못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콧방귀를 쳤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학생인데, 과연 누가 나에게 학생다움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른들의 시선에서 아무리 학생다움에 대한 열변을 쏟아내도 그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환상을 다른 대상에게 부과하고 있을 뿐이다. 학생답다는 것의 정의를 학생인 당사자 외에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떤 모습이든, 그 사람이 학생인 이상,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다 학생다운 것이 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실존은 본질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 또한 실존하는 현상이 본질을 유도한다고 주장했다. 의자를 예로 들어보자.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그 모양이 대부분 비슷하다. 대체로 넓은 등판 하나 와 다리 네 개로 고정된 형상이다. 만약 등받이가 없다면 윗면이 넓은 원통형의 꼴을 유지한다. 송곳처럼 중심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물건을 의자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다.
왤까? 그 이유는 인간의 생김새 때문이다. 인간은 다리가 길고, 척추를 가지고 있으며, 엉덩이가 넓적하다. 따라서 엉덩이를 받쳐줄 평평한 널빤지와 다리를 굽힐 수 있는 일정 수준의 높이가 필요하다.
의자의 목적은 '앉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의자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 몸의 생김새를 근거로 상정했을 때만이 의자라는 도구의 본질을 보다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즉, 인간의 몸(현상)이 의자인지 아닌지(본질)를 구분하는 근거가 된다. 현상이 본질을 유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무언가 다움(-ism), 정체성, 사상 체계,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근간은 실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이데올로기의 근간은 결국 실존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밀란 쿤데라는 <불멸> 작품 초반에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세상 사람의 수에 비해 몸짓 수가 비교도 안될 만큼 적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몸짓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짓이 사람을 사용한다고 보았다. 즉, 몸짓은 인간의 모습을 결정하는 강력한 힘이며, 인간은 그 몸짓을 실현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야녜스의 아버지가 이야기한 조물주의 컴퓨터와 같이 우리 삶은 우연에 의해 좌우되며, 인간은 하나의 원형이 있을 뿐 일련번호 같이 구별되는 독창적인 차별성이란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메를로-퐁티 철학의 근원은 '몸'으로 상정된다. 몸이란 현상이자 본질이며, 또한 판단의 근거였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몸이야 말로 모든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다. 몸은 세상과 자신의 경계, 즉 존재의 경계가 된다.
그런데 그런 판단 근거가 되는 몸짓은 수없이 겹쳐지는, 일련의 구분번호와 독창성도 없는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을 겹쳐 납작하게 왜곡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존재에게서 유도되는 이데올로기가 납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