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관측한다. 고로 존재할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존재하는가?
사실 나를 제외한 그 무엇도 세상에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내 눈앞에 보이는 당신은 당신이 실재한다는 증거인가?
본다는 것은 빛, 즉 전자기파의 주파수를 지각하는 것이다.
나는 정확히 당신을 볼 수가 없다.
나는 당신이 반사하는 가시광선을 볼 뿐이다.
나는 당신을 보는 게 아니라 내 망막 뒤로 넘어오는 전자기파 파장의 굴절된 형태를 원뿔세포와 막대세포를 통해 인식할 뿐이다.
더 정확히는 서로 다른 주파수를 식별하는 우리 눈의 수용체가 생성해 낸 신경 신호의 심리물리학적 반응을 인식할 뿐이다.
전자기파에 자극받은 세포가 만들어 낸 전기적 신호가 내 뇌에 전달되어 당신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도록 처리했을 뿐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반사되어 오는 빛을 본 것일까?
정확히는 빛을 본 것도 아니다.
광원으로부터 나오는 물리적 대상은 광자이다.
광자는 파장의 형태로 구분될 뿐 그 자체의 어떤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내 눈에서 감지할 수 있는 파장의 한계만큼만, 그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당신에게 색을 부여하고 형태를 인식한다.
내가 당신을 본다면 그것은 당신과 나 사이의 수많은 진동 선들이 매질이 되어 당신의 영상을 나에게 옮겨주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당신은, 당신이 가진 본질적 특성에 대해 아무것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의 형태를 온전히 마주한 적이 없고, 마주할 수도 없다.
사진이나 거울도 왜곡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형태도 온전히 마주한 적이 없고, 마주할 수도 없다.
나는 사실 한 번도 당신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내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그저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왜곡되고 재구성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당신의 실재를 직접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나의 감각기관과 뇌가 왜곡해 낸 당신을 볼 뿐이다.
나는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된 존재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인지한다고 착각하는 당신은 내 내부에서 형성된 또 다른 형태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실재하는가?
나는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믿는다.
당신이 거기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접촉이 비록 서로가 가진 전자와 전자 사이의 반발력으로 서로를 밀어내는 현상일지라도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종교의 본질은 믿음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게 종교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당신은 내가 믿기로 선택한,
내가 받아들인 단 하나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