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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를 사랑할 수 없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오마주


1.


나는 계속해서 델과 사귀기로 결정했다. 내가 좋아하는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는 상황이 싫어서 그동안 나의 기분을 풀어주고 내 고민을 적극적으로 들어주었던 친구들에게는 더 이상 델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델과 나의 관계의 지속성을 두고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왜곡된 사랑의 현실에서 벗어난, 그나마 유토피아와 현실의 경계선에 서있는 지금의 나였다면 당장에라도 "헤어지라"는 결론으로, 모든 사랑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거론할 때에 의례적으로 명쾌한 지혜처럼 보이는 합의점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위선적인 생각과 복잡한 관점에 취해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기 전에 나는 이성과 객관성을 소외시키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불행한 선택이라도 그의 옆에 있겠다는 결론이었다.


2.


이성을 가진 객관적 존재인 우리 주변의 타인들을, 우리의 이야기에서 배척시키고 소외시키면서 스스로 타당성을 부여했던 부분이 있다. [이미 우리와 그들로 나뉘고 있다.] 바로 그들과 내가 델에 대한 '라이트모티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공유한 라이트모티프는 마치 교향곡에 차례로 쌓이는 선율처럼, 두터워지는 화음처럼 함께 연주하는 곡 자체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여전히 둘만의 라이트모티프는 계속 쌓여 가고 있었으며 그것이 사랑이라는 고양된 위험성을 내재한 경험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충분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아이덴티티가 되어주었다. 즉, 서로를 향한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서로에 대한 '확인'이 되어주었다. 타인의 공감을 일으킬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시간에 예속된 까닭에 우리는 미처 스스로 파악하지도 못한 자신들의 희미한 자아를 서로에게 결합하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공유된 경험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을 설명해 줄 유일한 존재이길 기대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는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서 누구에게 강요된 것이었을까?


3.


델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는 나를 믿는 것조차 망설여왔다. 과연 진실일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다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발언으로 인해 그가 꽤 방어적인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회의주의자임을 짐작했다. 믿음 없이 사랑을 하는 그는 사랑을 대할 때 여전히 철학자 노릇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때문에 나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선택하지 않는 그의 사랑이 실제 하는지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도 틀린 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그 철학자는 존재만으로 우리의 사랑이 실제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바람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는지 끝없이 고민하게 했다. 이 안타까움이 그를 향한 것인지 내가 이상화한 사랑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델에게 델과 만나기 전의 연애에서 깨달았던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과 연결되는 기쁨, 신뢰에 기반을 둔 안정적인 관계,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 내가 있을 곳을 찾았다-방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전부 상대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도박과 같은 믿음을 건 후에야 상급처럼 주어지는 것들이었다.


[벌써부터 겁먹고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다니, 대체 얼마나 마음이 너덜거리고 약해진 거지? 어쩌면, 내가 계속해서 사랑을 준다면 그를 회의주의에서 꺼내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그의 구원자로서 그의 인생에 등장한 한 줄기 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 여기기도 했다.


4.


나는 정작 그를 신뢰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의 신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는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굴복하고 말았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나는 철학자 노릇을 하려는 그와 비슷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관계에서의 나와 델 앞에서의 나를 비교했다. 압도적인 분노와 불안으로부터 감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달리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을 증오한다.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지 모르기 때문에 자존감이 없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게 때문에 책임감이 없다. 나는 나의 사명을 그와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존감과 책임감이 결여된 사명이었다. 때문에 나의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사명을, 그 의무의 짐을 델과의 관계에 뒤집어 씌우게 되었다. 나는 박탈당한 애착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기 위해 그에게 신뢰를 받으려, 그의 사랑을 받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면에는 여전히 이상화된 사랑을 기대하는 한편으로, 또다시 박탈당할까 두려워 의심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5.


어쩌면 델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델의 신뢰를 사지 못할까 봐, 델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어쩌면 그냥 나 자신이 상처받기 싫어서, '사실'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할 것 같은 그런 대답을 들려주는 사람으로서 존재해 왔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랑받는 다면 그건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 사랑의 소유권은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의 생존이란 어쩌면 내가 나로 동일시 하는 존재를 유지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의 지속성을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로 동일시하는 것을 숨기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거절당해도 타격이 없는 거짓 존재로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질문들은 비극의 시작을 알렸다.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내면에서 분노가 일고, 그 분노를 억압하는 데 에너지를 쏟느라 우울하고 무력해지고, 그러나 이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억압하는 것의 악순환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것에 번번이 타격을 받는, 주변 사람들을 이해시키기도 스스로 진정시키기도 어려운 감정적 재앙의 서막이 울려 퍼졌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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