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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Aug 12. 2017

What is normal

일반과 평범의 권위

기어이 듣고 말았다. 장애인 소리. 정확히는 교수가 나에게 ‘언어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혹시라도 장애가 있는 것이면 자기가 참고하겠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게 조롱인지 아니면 진심이 담긴 걱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교수와 나 사이에는 멸시와 회피, 조롱과 변명 이외에는 별로 남은 것이 없다.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는 일 년이 넘었음에도 이 인도 출신의 교수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이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것이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가 싶다가도 어떨 때는 그냥 못돼 먹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와 공부하면 영어는 자연스레 는다고 하던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의 영어는 점차 줄어갔다. 아니 말수가 점차 줄어갔다. 나는 이제 하루에 몇 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나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하필 이 학교는 유학생 수도 적다. 그래서인지 유학생들이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그래서 이곳에 온 유학생들은 재빨리 적응하는 데 성공하거나 낙오되거나 둘 중 하나다. 학생들 앞에 서면 낙오자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까지 했다. 말하는 것이 무서운 것을 넘어 사람이 무서워지고 있다. 지금 상황을 인지하고 바꾸어야 하는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 상황을 알고는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듯하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나에게는 이것이 도통 가능하지가 않다.


학기말,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여느 때와 같은 실습 시간이었다. 학부 2학년들이 듣는 프로그래밍 수업이었다. 많은 프로그래밍 수업이 그렇듯, 학기 초부터 프로그램의 작은 부분들을 완성해서 쌓아가는 형태의 수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기 초에 실습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뒤쳐진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학생도 나온다. 그들을 대할 때에는 조심스럽다. 그들은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영어라는 ‘언어’로 답답한 나와 프로그래밍 ‘언어’로 고통받는 그들의 처지.


한 여학생이 손을 든다. 도와달라는 이야기다. 나 말고 두 명의 조교가 더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다른 학생들과 이야기 중이다. 학생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가득한 것을 보니 절박한 듯했다. 다가서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고 질질 끌린다.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보니 결과가 엉뚱하다. 그 학생은 본인이 만든 프로그램이 에러도 없이 실행되는데 그 결과가 엉뚱하니 미칠 노릇인 것 같았다. 코드를 들여다보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몰라 당장은 손 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프로그램의 작은 부분들을 만들 때마다 오류를 수정했으면 좋았을 것을 정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반년을 끌고 왔으니 완성 단계에서 적절한 결과가 나올리는 만무했다.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오늘 만든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전에 짰던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듯 해. 지금 현재 상태에서 오류를 찾을 것이 아니라 다시 작은 부분으로 돌아가서 그 결과가 하나하나 정확한지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떻겠니?”


그녀는 짜증 가득한 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전체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만일 예전에 뭔가 잘못되었다면 여기까지 내가 올 수도 없었을 거야… 지금 이 결과가 왜 제대로 안 나오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줘.”


성심성의껏 진심의 표정으로,


“그러니까… 원인을 거슬로 올라가면, 오늘 실습한 부분이 아니라 예전 부분이 문제일 수 있다는 거야…”


여기까지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얼씨구, 울고 싶은 건 나다.

아무리 내 영어가 답답하다고 해도 말이야 울 것 까지는 없잖아?’



“너… 너 말이야… 넌 지금 내 말뜻을 이해 조차 하고 있지 못하고 있잖아…”


아니다. 나도 이해는 한다. 말하기가 안된다 뿐이지 네가 하는 말은 다 들려.


“음… 일단 진정하고. 일단 마음을 가라 앉히면 어떨까? 내가 다른 조교를 불러줄게.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에 더 화가 났다.



미국인 조교가 와서 보더니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학생에게 해준다. ‘푸~’ 소리가 나게 입술 사이로 긴 숨을 내뿜더니 급기야 강의실을 나가버린다. 당혹스럽다. 


동료 조교가 다가오더니 짧은 위로의 말을 건넨다.


“괜찮아? 뭐라고 이야기를 했길래 저러는 거야?”


“모르겠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지… 아무래 그래도 저런 반응이 일반적(Normal)인 것은 아니잖아?”


그 조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짧은 정적 이후, 고래를 살짝 갸우뚱하더니 되물었다.


“What is normal?”


그러니까 대체 일반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되물음.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 사회에서 나의 존재는 일반, 평범과는 너무가 거리가 멀었으니까.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이야기한 평범.


평범의 정의는 이렇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다.’ 또는 흔히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보편’이라는 뜻으로 통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개념인가? 사회를 바라보는 개인의 인식이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즉, 사회의 일반이라고 생각되는 개인의 시각이 ‘평범’이라는 정의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일반 또는 평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는 다소 위험이 따른다.


이러한 위험은 피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자기 고양 편향'에 지배를 받는다. 자기 고양 편향이란 남들보다 나 자신에게 더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고 오류를 말한다. 언뜻 당연한 심리인 듯 하지만 사실 논리적으로는 명백한 오류이다. (예를 들면, 내가 속한 조직이 성공했을 때에는 나의 역할이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고 느끼는 이가 많다. 반면, 실패의 경우에는 조직의 구조적 결함이나 팀워크 등으로 원인을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내로 남불’의 심리는 인간 심리 깊숙이 자리 잡은 ‘기본값’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과 평범은 권위의 단어다. 남에게 쉽게 평범이라는 단어를 내뱉지만 이는 자기 고양을 감추기 위한 장치와도 같다. 사회라는 권위를 빌어 나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작 평범 때문에 그렇게 민감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 맞다. 일상에서 평범에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평범이라는 것이 결국은 나의 기준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을 인정은 아니더라도 인지는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평범의 특이성은 지금과는 다른 먼 사회에서 ‘소수’로 살았을 때 느껴졌다. 내가 이야기한 평범이라는 폭력과 나에게 주어졌던 ‘특이’의 굴레가 실제로 다가오는 경험은 내가 ‘다수’ 일 때는 쉽게 할 수가 없다. 결국 세상의 보편도 결국은 나의 시각일지도 모른다. 매번 평범과 일반에 대해서 검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문장을 떠올려 본다.


“What is nor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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