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at tire
월요일이 되자 누나와 매형은 회사로 출근을 해야 했다. 오전 8시쯤에 집을 나섰고 나는 문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이제부턴 진짜 나 홀로 미국의 일상을 겪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마냥 집에 있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다.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매형은 출근 직전에 거실 한 구석의 자전거를 가리키며,
"저 자전거 타이어 바람 다 빠졌거든. 주차장 쪽으로 나가서 대로변 쭉 따라가다 보면 자전거 가게 하나 나오는데, 거기 가서 바람 다시 채워와 봐. 아마 속에 튜브 찢어졌을 거야. 플랫 타이어(Flat tire)라고 얘기하면 돼."
집의 거실 한 구석엔 자전거 두 대가 놓여 있었다. 누나와 매형이 운동을 하기 위해 사놓은 자전거들이었다. 그런데 두 자전거의 타이어 모두 바람이 빠져 잔뜩 찌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자전거 구입 시 가졌던 운동 의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미국 도착과 동시에 운동 의지로 꽉 차 있던 나는 자전거를 타기 위해 타이어에 바람을 넣어봤지만, 내부의 튜브가 찢어졌는지 타이어가 팽팽해지질 않았다. 결국 자전거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서는 별것 아닌 이 행동에도 준비 절차가 필요했다. 바로 의사소통에 관한 것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Where, When, Who' 등으로 시작하는 기본적인 영어 질문만을 구사하던 나는, 펑크 난 타이어를 고쳐 달라는 말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지 생각해야만 했다. 인터넷에 '펑크'의 스펠링이 p로 시작되는지 f로 시작되는지 찾아보기도 하고(글씨 써서 물어볼 것도 아닌데;;) 문장을 만들어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펑크라는 말의 원형이 Puncture라는 단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My bicycle's tire is punctured... I wanna fix it..."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알아서 고쳐주겠지?'라고 생각하다가, '그냥 타이어 상태 보면 알아서 해주려나?', '다른 단어를 써서 영작을 해 볼까... 다른 표현이 뭐가 있나...' 하며 몇 번의 고민을 거듭했다. 딱히 새로운 표현이 떠오르지 않자 일단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집 밖으로 한 걸음 나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 싶었다.
아파트를 나선 도로 한 구석의 자전거 도로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갔다. 이곳의 도로들은 제법 많은 구간이 자전거 도로를 포함하고 있었다.
타이어 바람이 다 빠진 탓에 일단 자전거는 끌고 가야 했다. 한 30미터 정도 걸었을까. 멕시칸으로 보이는 사람이 두 명 정도 보였는데, 그들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고 상태도 조금 안 좋아 보였다. 약간의 위협을 느꼈다. '저들이 나에게 돈을 뜯어가는 건 아닐까?'하는 중학교 시절의 쭈구리 근성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순간 자전거에 올라탔다. 페달을 발로 좀 굴러봤는데 바람 빠진 타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일단 그렇게 멕시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전거 가게까지 이동했다.
자전거 가게는 사진에 나온 것처럼 매우 작은 점포였다. 주변에 다른 상점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뜬금없이 있던 가게였다. 가게 안은 벽부터 천장까지 자전거와 자전거 용품들로 가득했다. 자전거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우선 'Excuse me'를 외쳤고,
"Mmm... My bicycle's tire is punctured... I wanna fix it..."
준비한 멘트도 읊었다.
"Ah... Flat tire~"
점원은 플랫 타이어라는 말로 답했다. 생각해보니 이 단어는 아침에 매형이 내게 했던 말이다. 매형이 말해줄 땐 내가 몰랐던 단어라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점원이 저 단어를 말하자 머릿속에 'Flat tire = 바람 빠진 타이어'라고 입력 및 저장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에 했던 영작들이 바보같이 느껴지면서도, '언어는 이렇게 배워나가는 거구나'싶기도 했다.
점원은 타이어를 벗겨내 상태를 살폈고 튜브까지 갈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지불해야 할 금액은 20.5달러. 미국의 팁 문화를 고려해 22달러를 건네준 뒤 거스름돈을 주려는 점원에게 'It's for you'라고 쿨하게 말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점원은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팁을 알아서 챙겨 주며 '미국 생활에 조금은 녹아들었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현지에 사시는 분들은 비웃으셔도 됩니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작업이 끝난 자전거를 건네받고 집으로 향하다가 누나가 이야기해줬던 자전거 코스를 가 보기로 마음먹고 방향을 틀었다. 강변에 나 있는 자전거 코스였는데, 강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물이 없었다. LA의 가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랑천만도 못해 보였던 그 강이 Los Angeles River의 일부였다.)
강변에는 홈리스들의 흔적이 존재했다. 짐이 한가득 담긴 카트가 여기저기 있었고 어디에선가 주워 와서 사용하는 듯한 텐트들이 있었다.
홈리스들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어서 또다시 쭈구리 근성이 발동할 뻔도 했지만, 내가 당시에 본 홈리스는 단 한 명으로, 한참 낮은 지대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정말 세상 편한 모습이었다.
홈리스들의 집을 구경거리 삼아 30~40분 정도 되는 자전거 코스를 왕복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무거웠던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집으로 들고 들어와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자 미션을 하나 클리어 한 기분이 들었다.
미국인과 대화를 하며 자연스레 단어를 하나 외웠다는 것, 자전거를 타며 운동을 했다는 것, LA는 가뭄이 심하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 집 주변 지리를 어느 정도 익혔다는 것 등등,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처럼 느껴졌다. 현지인이 봤을 땐 그저 자전거 타이어 펑크를 때웠다는 것 정도가 전부인 별 것 없는 하루일 수도 있겠지만, 타국에서 겪는 일상은 하나하나가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일상들에 하나씩 적응해 가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미국행은 서서히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