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하루키 소설은 끝났다.
소설 속 묘사처럼, 그의 소설은 '8미터 남짓한 굳건한 벽'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아주 먼 기억 속, 촉촉한 감정의 덩어리를 느끼기 위해서는, 나 역시 내 '그림자'를 버리고, '그 도시'로 들어가야만 했다.
쇼츠와 릴스가 범람하는 「도둑맞은 집중력」의 시대에 767페이지짜리 벽돌 같은 소설책을 읽는다는 것은, 웬만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하긴 쉽지 않았다. 「2024 트렌드 코리아」에서도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분초 사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1분 1초를 살아가는 지금, 비현실적인 두꺼운 소설책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하루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던 이상, 책이 출간되자마자, 사전주문을 했다. 늘 그런 식이다. '일단 책장에 꽃아 두자.' 그리고, 읽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언젠가 책이 나를 부를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 달 반 전쯤, 3박 4일의 일본 출장이 잡혔다. 공항의 게이트 앞에서,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도쿄의 이름 모를 공원에서 하루키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설레었다. 읽을 시간이 없을지라도, 가방이 무겁게만 느껴질지라도, 도쿄에서 하루키를 읽는다는 것은, 왠지 어울리는 읽기 행위인 듯하여 뿌듯하기까지 했다.
나에게 소설을 읽는다는 건, 휴식이고 의식이다. 나는 일 년에 많치는 않지만, 대여섯 권의 소설책을 본다. 무언가 쉬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드는 연휴나, 멀리 떠날 때 의무적으로 소설책을 챙기는 일종의 리추얼로.
소설을 읽을 땐, 무비 트레일러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그 어떤 사전정보도 읽지 않고 그냥 소설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게 하면, 소설 속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은 걸리지만, 온전히 그 안에 머물 수 있게 되는 느낌이 든다.
「상실의 시대」를 처음 접한 후 30년간, 하루키의 책을 27권 읽었다. 소설은 물론, 그의 다양한 에세이들까지. 그는 나의 최애 작가이며, 단일 작가의 작품으로는 가장 많이 읽었다. 그렇다. 난 '하루키스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하루키 책을 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보문고 작가별 판매부수 1위의 작가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많은 외국작가일 테니까.
「1Q84」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기사단장 죽이기 」 등의 소설을 통해, 비현실 적인 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빠져들었었다. 하지만 이번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은 ‘뭐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평행우주론'을, 현실과 비현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오가던 그의 작품들과 이번 작품은 다르게 느껴졌다. 호접몽처럼 어느 것이 현실인지 어느 것이 비현실인지 당최 가늠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소설을 통해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 지적 호기심과 허영심 사이에서 전문가들의 리뷰를 찾아보면서, 나 자신의 문해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확인하며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해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던 소소하지 않은 기쁨이었다. 상상 속의 도시로 들어간 나, 움직이는 벽, 시곗바늘이 없는 시계, 나와 얘기하는 분신인 그림자, 책 없이 달걀모양의 꿈만 가득 찬 도서관, 대파 두 뿌리를 침대에 두고 떠난 도서관장 부인, 서번트 증후군의 옐로 서브머린 파카의 소년, 요트파카를 입은 목각인형, 남색 베레모와 치마를 입은 도서관장.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이 ‘불확실한 벽’을 넘나들며 소설을 읽다가, 나는 그만 길을 잃었다. 하루키의 잘못이 아니다. 하루키는 약간은 뻘쭘하게 "자기 소설에는 '후기' 같은 걸 덧붙이는 일을 원래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라며 자기 소설에 작가 후기를 붙였다. 그리고 이 책은 이렇게 끝이 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이제, 하루키는 그만 읽어야 할 것 같다. 자기 복제가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변주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다. 나에게 해석해야 할 너무나 많은 것은 넘겨준다. 내가 변한 것이다. 그저 편하게 읽고 싶다. 나에게 소설을 읽는다는 건, 휴식의 리추얼이니까.
하루키 책을 들고 간 일본 출장 중, 하코네의 폴라 미술관에서, 마치 내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등장하는 아이즈와카마쓰시의 Z** 마을에 위치한, 고야스 씨의 도서관에 와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하루키가 준 마지막 선물처럼. 그것은 나만의 기분 좋음이었다. 인생에 이런 장면을 만나는 순간, 하루키의 소설과 내 인생의 불확실한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래서 난 또 언젠가, 마지막 작품일 것 같고, 실제로 마지막 작품일지도 모르는 하루키의 새로운 소설이 나오게 된다면,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사전주문을 하게 될 것이다. 하루키는 내게 그런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