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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Feb 21. 2023

6번째 승진 누락, N잡러의 시작

조용한 퇴직(quiet quitting)을 실천 중입니다만.


또 미끄러졌다.


브런치를 보다 보면, 은근히 승진 누락에 대한 글들이 많다. 이건 내 마음속 알고리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어서라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지난 1월 31일. 내 생일 다음날 이거나, 내 생일날은 그룹 정기 승진 인사날이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은 생일을 제대로 맘 편히 보내본 적이 없다. 근데, 올해 생일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6번째 승진 누락.

그리고 내 나이 마흔여덟이다. 곧 나라에서 한 살 깎아줄 테니 마흔일곱이다. 내가 말로만 듣던 '대기업 만년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단 것이 이제야 확정 됐다. 나 스스로 ‘만년’의 기준을 그동안 부인해 왔는데, 이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정의 문제였던 것이다.


6년 전,

난 팀장이었다가 팀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당시에는 인정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내가 만든 것이었다. 대표를 무시하고 있는 마음이, 낭중지추도 아닌 것이 삐져나와 하는 일에서도 티가 났을 게다. 그리고, 대표는, 그게, 그렇게, 내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게, 꼴 보기 싫었나 보다.

옮겨간 팀에선, 그땐 그냥 멍하니 있었다. 억지로 끌어내려졌으니까. 대표 입장에선 뭔가 명분은 만들어야 하고, 나의 전문분야를 챙겨주는 모양새를 만들어야 하니, 그 팀에서 내 분야에 대한 지원을 하란다. 사실 그렇게 만들어진 업무는 별로 할 일이 없다.


나에게 강제로 주어진 멈춤의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책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내 스스로 적응을 하고, 여유를 가지고, 이 시간을 즐기고 아까워하며,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이전 독서노트를 찾아보니, 박승호·홍승완 작가의 「위대한 멈춤」을 시작으로, 2018년에는 총 94권의 책을 읽었다. 「코스모스」, 「총·균·쇠」와 같은 이때가 아니면 읽기 힘들었던 책들을 포함해서.


지적호기심을 가장한 지적허영심으로 그동안 사놨던 철학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대철학에 난 나도 모르게 꽤나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한번 읽기도 어려워 ‘아무리 읽어볼’ 시도 조차 해볼 수 없었던 책들과,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동시대 철학자에 대해 실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난 그렇게 에버노트에 하나둘 씩 써가면서 나만의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졌던 일이었음에도.


바로 퇴사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은 내 마음속에 없었던 게다. 당시에는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볼 자리도 없었다. 돈 안 되는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국내에 이런 회사도 몇 개 없다. 작년엔 적극적으로 드디어 면접을 봤었다.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그러나 진실성이 떨어진 어설픈 이직 시도는 면접관에게 화면 너머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낭중지추. 나도 면접관으로서 그런 것도 느껴 봤으니.


예전엔 회사가 이렇게 일 잘하는 나를 안 써먹고 있는 사실에 대해 화가 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 그동안 나는,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임장을 다니고, 투자를 했다. 지금은 하락장을 맞아 조금 이자 부담을 느끼며, 쉬면서 부동산 공부를 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나는 조용한 퇴직(quiet quitting)을 실천 중이다.

시간 맞춰 출근은 하되, 내가 딱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받는 만큼만 일한다. 더 이상 일하는 것은 불공정거래이다. 그리고는 퇴근 후의 나만의 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 둔다. 나의 퇴근길은 나의 출근길이 된다.


승진으로 연봉이 오르는 것은,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깨끗이 포기했다. 월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금리 인상으로 아껴 쓰는데도, 투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는 워렌 버핏의 말이 떠올랐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부의 추월차선」의 수익 자동화로 부자 되는 방법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직장인 월급쟁이라는 노예계약을 최소화하고, 자청의 「역행자」에서 나온 자의식을 해체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아닌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본다. ‘월급 외 수익을 100만 원 만들어보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것 저것 찾아본다. 막상 해보려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어디 가서 백만 원을 번단 말인가.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한다. 나보다 20살 넘게 어린 친구들의 유튜브 콘텐츠도 열심히 본다. 스마트스토어, pdf 전자책 판매, 블로그 광고 수입, YouTube 채널개설, 공동구매 중개 수수료, 온라인 인형 눈깔 붙이기라는 데이터 라벨링까지. 퇴근하고 돈 버는 기술들은 끝없이 많다. 시작하냐 마냐의 문제다.


2023년 2월 10일. 나는 브런치작가가 되었다.

지난 2018년, 나의 ‘위대한 멈춤’의 시기에도 브런치 작가에 신청을 하려고 이것저것 글쓰기를 했었다. 그러나 정작 당시에 무슨 무슨 이유로 그냥 그렇게 또 잊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이번에는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으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 N잡러 채널을 여러 개 보다 보니,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제가 알려드려도 어차피 99%는 안 해요. 하시는 분 1%를 위해 이렇게 영상을 찍고 있는 거예요. 또 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직장인의 몇 대 허언 중 하나인 ‘나 유튜브 할 거야!’를 실천한다.

할 줄 아는, 잘은 모르지만 하고 싶은 것을 찾다 보니 “철학”채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채널을 개설했다. 물론 영상을 만드는 건 공부한 다음에 해야겠지만. 그때 읽었던 책들 그것들이 나에게 도움이 될 줄이야. 책은 읽어놓으면 언젠가는 다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은 안나도 말이다.


구 신사임당, 주언규 PD의 유튜브 강의를 차곡차곡 들으며 늦깎이 유튜버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요 며칠 ‘우주고양이 김춘삼’으로 시작한 표절 논란과 저작권 문제가 터져 시끄럽다. 시작도 하기 전에 유튜브 저작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초긍정 모드로 변신한다. 강의도 다시 찾아봐야 하고, 내가 영상을 올리게 되는 날은 조금 늦어지겠지만,  일단 공부하고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하는 과정을 기록해,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유튜브 겁쟁이들에게 <내일모레 50 아저씨도 시작하는 유튜브> 란 제목으로 pdf 전자책도 팔아볼 생각이다. 그렇게 “위대한 멈춤”의 시간을 지나 N잡러로 한 발자국 내딛는다.


승진 누락은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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