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한 달 전,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웃기지도 않게 소설책도 많이 읽지 않은 내가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나만의 글, 나만의 서체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생각난 단 한 명의 작가. 사실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책 이미지와 제목만 어렴풋이 기억났었을 뿐.
마쓰이에 마사시.
일상적이지만 디테일한 상황의 표현과 감정의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렇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대한 기억으로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그의 두 번째 책을 사놓은 것을 기억해 냈다. 2018년에 나온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지지난 주말 본가 서재에 가서 장작난로 연기로 훈제된 장작냄새가 나는 책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다. 읽을 때는 몰랐지만 벽난로라는 소재가 있었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을 다시 이어주게 만든. 그리고 소설에서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한, 시험에서 꼭 나오는 그런 중요한 의미가 있을 듯한 작가의 장치.
책날개에 쓰여있는 작가의 소개를 간단히 요약한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나와 대학시절 어떤 문학상에서 신인상을 탔다. 그리곤 출판사에 입사하여 편집장을 지내다 퇴사를 하고,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2012년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발표하고 늦깎이 작가로 문단에 발을 들였다. ‘명석하고 막힘없는 언어의 향연’ ‘유구하게 흐르는 대하를 닮은 소설’ ‘풍요로운 색채와 향기를 담은 경탄을 부르는 작품’등의 호평을 받고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뒤, 편집자로 또 활동하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을 펴냈다. 마흔여덟 살, 이혼 후 다시 독신이 된 남자 주인공이 새 동네, 새 집에서 인생 제2막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 특유의 투명하면서도 격조 있는 문장으로 일본문학의 정수를 보인다.
일본문학. 나는 왠지 모르게 일본 소설가들의 소설에 끌렸다. 어쩌면 일부 일본문학 특유의 잔잔함을 좋아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 후 5분 동안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본영화의 도입부처럼 말이다.
대부분 그랬듯이 대학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한 7,8년 전, 초판본의 디자인을 살린 「노르웨이의 숲」 이 한정판으로 나와 다시 읽었을 때는 전혀 다른 내용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책이란 건 참 신기하다는 경험을 했다. 몇십 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이었는데, 그때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학교 도서관과 그 앞 자판기커피도. 그리고 그 앞에서 팩차기를 하던 복학생들 까지도. 마치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처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오컬트적 요소와 초현실주의적인 존재를 선물한 것 같은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하루키 소설은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뒤로는 장편소설이 나오지 않았다.
2018년 여름휴가 때 장맛비 소리를 신나게 들으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었다. 젊은 시절의 현실주의적인 하루키 소설을 만난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지도.
“이혼을 했다”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은 어찌 보면 별 내용 없다. 이혼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나와 동갑의 한 중년을 그리고 있고, 다시 사랑을 한다는 평이한 이야기이다. 사실 바람을 피우고 이혼을 당한 상황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주인공다운 첫마디로 시작한 이 소설은, 그 문체에 있어서는 정말 감탄사가 나오는 대목들이 많았다. 사실 내용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작가의 표현이 더 궁금해져 재미있게 읽어 갔는지도 모른다.
줄 치며 읽어갔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의 뇌를 훔치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마사시의 표현들을 체화하고 싶어 꽤나 많은 문장을 노션에 옮겨 두었다. 그중 몇 개를 골라보면,
기한 내에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물건을 찾기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남극대륙 한복판에서 혀를 델 것 같은 양파 그라탱 수프를 먹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관 앞에는 실수로 착륙한 미확인 비행 물체처럼 반달 어묵 모양의 알루미늄제 우편함이 서 있었다.
광대한 카펫의 황야에 사는 무수한 진드기가 일제히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오래된 집 특유의 간장과 된장, 장아찌가 뒤섞인, 습기 있는 냄새가 어디선가 풍겼다. 피아노와 오디오, 헌 책꽂이에서 풍기는 나무와 쇠가 뒤섞인 건조한 냄새도 났다.
그을음으로 검게 변색된 천장을 올려다보자 꼽등이가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 긴 다리를 구부려 붙어 있었다. 소름이 좍 돋았다… 가만히 있으면 또 몰라도 착지 위치를 정하지 않고 무계획하게 점프하는 상대방과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
묘하게 아양 떠는 목소리와 무뚝뚝한 응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음성 안내 같은 상담원을 상대해야 한다.
여자의 진짜 매력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비롯된다. 화장도 웃음소리도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은 재미없다. 남자의 매력과 무의식 영역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는 남자인 나는 전혀 알 수 없거니와 관심도 없지만.
모자챙처럼 내민 차양은 집 내부의 연장 같고 나무도 불그스름하게 변색되어 마치 잘 생긴 귀를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든다. 아주 짧은 커트머리였을 때 가나의 귀.
커다란 짐을 깜박 두고 온 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갔다.
오카다는 아직 사십대잖나. 월급은 많이 받으면서 마음 편하게 혼자 살지. 이걸 우아하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마른걸레질도 했으니 샌드위치를 떨어뜨려도 주워 먹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할 것이다. 이런 용의주도함이 내 한계인데, 그래도 그만두지 못하겠다.
1970년 대 초반의 고도 경제 성장기,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응접실에는 가구식 컬러텔레비전과 이런 응접세트가 있었고 유리문이 달린 책장에는 헤이본샤 대백과사전이 빽빽이 꽂혀 있곤 했다. 똑같은 광경이 일본 전국의 중류 가정에 열병처럼 퍼져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레이스 깔개와 크리스털 재떨이. 좁은 마당에는 계속 짖어대는 스피츠. 더 여유가 있는 집은 추가 장비로 업라이트피아노가 들어갔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지출이 꽤 컸지만 나는 만족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폴 기에홀름이 디자인한 등나무 헌팅 체어를 이층 다다미방에 놓고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고 싶다. 사십 대 후반에 이렇게 물욕 넘치는 꿈을 꾸다니.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방귀도 마음껏 뀔 수 있다. 다만 아무 저항도 없이 시간이 스르스르 지나가는 것은 정말이지 심심하다. 외롭다면 외롭다. 하지만 이 심심함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은 나와 닮았다. 그래서 인가. 더 빠져들어 읽었던 것 같다. 마흔일곱. 난 혼자서, 같이 살사람의 집에 살고 있다. 사십 대 후반에 통장은 비었지만, 물욕 넘치는 삶을 살고, 자유롭고 외로운 생활에 익숙해졌다.
퇴근을 하고 재건축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면 속도를 줄이고 야간투시경을 낀 것처럼 이중주차된 차 너머로 주차할 곳을 찾는다. 먼지와 손자국 가득한 차를 두세 대 밀고 나의 골프를 세우고 나서, 복도식아파트의 2층에 위치한 우리 집을 아주 나지막이 올려다보면, 마치 서재에 누가 있는 것처럼 나의 도착을 알아차린 애플홈이 내가 외롭지 않게 노란 등을 켜놓았다.
띠띠띠. 띠띠띠. 또르르. 현관문을 열고 세 칸으로 나눠진 투명 중문을 열고 나면, 어제 먹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어렴풋이 올라온다. 중문을 넘으면 나의 플레이리스트가 거실과 부엌의 애플홈팟에서 흘러나온다. 오늘은 무슨 음악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케아 부엌에 오로라블랑 인조대리석을 말아 올린 벽면에선, 상부장아래 이케아 이르스타 조리대 조명이 이미 잉크를 먹어버린 물의 가냘픈 선 같은 가짜 대리석의 질감을 비추고 있다. 프라이탁 가방을 내려놓고, 오로라블랑 인조대리석 아일랜드에 매립한 르그랑 무선충전기 위에 아이폰을 올려놓는다.
퇴근 전에 물을 마시지 않고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에 오자마자 ‘챠악’ 하고 터지는 캔맥주를 위해 목마름을 유지했다. 샤이니퓨어그레이의 스탠드형 김치냉장고 왼편을 연다. 한 칸에 500ml 16캔씩 가득 찬 세 칸의 맥주냉장고에서, 뒤편에 있는 가장 비싼 에비수맥주 한 캔을 집어 들고 에비수 맥주잔에 따른다.
“우아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소설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