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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Sep 20. 2017

한없이 투명한
엔터테인먼트와 소비자 사회

혹은, 오디션 프로그램과 21세기의 미디어 산업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하는 [인문예술잡지 F] 16호(2015.03)에 쓴 글이다. 주제 뿐 아니라 제목마저도 '문예 비평'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만, 이 글을 쓸 때에 내 머리 속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소비자사회, 투명성, 모바일 환경, 크리에이티브, 관점, 독자/사용자 등의 단어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한편, 이 글이 모바일 환경에서의 미디어 산업 비평으로 읽혀도 좋겠다는 바람이 (소박하게) 있다.

여기에 올리는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2017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못생기고 매력 없는 내 아내가
어떻게 거울 속에선 저렇게 아름다운 걸까?
_안톤 체호프 [굽은 거울]


“서예안의 장점인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이 더욱 돋보였다. 요즘 세대 가수 같다.” 2015년 1월, [케이팝 스타]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는 박진영은 참가자 서예안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양현석은 “이미 기존 걸 그룹 같다. 갈수록 많은 재능이 있다고 느껴진다.”고도 말을 보탰다. 하지만 [케이팝 스타]를 매주 챙겨보는 팬이 아니라면 서예안이 누군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녀의 실력에 대해서는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갈 지 모른다. 서예안을 비롯해 주요 출연자들인 정승환, 박윤하가 생방송에서 부른 곡이 다음 날에 곧장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현상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가수로 데뷔하는 경우가 늘어난 현재,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은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다.


여기에는 몇 가지 산업적 구조 변화가 작동하기도 한다. 한국의 음악시장은 세븐의 디지털 싱글이 최초로 등장한 2004년부터 네이버 뮤직이 오픈한 2007년에 이르는 동안 디지털 음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시장의 재편은 수익구조를 바꿔놓았다. 이전에는 앨범이 발표되면 시장의 반응을 살피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프로모션이나 마케팅이라고 해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공연이나 행사에 참석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디지털 음원이 시장의 지배적인 위치에 놓이자 음원을 발매하는 과정 자체가 프로모션이자 마케팅이 되었다. 포털로 유통되던 온라인 뉴스를 시작으로 블로그와 같은 개인 미디어를 거쳐 SNS에 이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판매하는 것은 점점 더 복잡하고 피로해졌다. 결과적으로 음원은 발매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게다가 하루에 발표되는 음악의 양도 막대하게 늘었고 대중이 음악을 접하는 채널도 더 다양해졌다. 이때 필요한 건 음악 구매를 위한 가이드다. 심사위원들의 한 마디가 이 가이드를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맥락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시사점이 존재한다. 먼저 개인 미디어나 마이크로 미디어가 등장한 21세기에도 올드 미디어로 분류되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현상(이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일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기존에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던 제작자들이나 작곡가가 대중을 상대로 발언한다는 점이다. 전자는 디지털의 시대에 텔레비전의 위치가 변화하는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최근 온라인 환경에서 가장 큰 이슈는 동영상 콘텐츠의 인기다. 유튜브 기반의 MCN(Multi Channel Network) 사업자들처럼 개인 미디어 제작자들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2013년과 2014년에 미국의 10대들이 뽑은 최고의 인기 스타는 할리우드가 아닌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었다. 


유튜브에 대항하는 또 다른 플랫폼인 넷플렉스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기반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배급하다가 최근에는 오리지널 영상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0대들에게 페이스북 이상의 인기를 얻고 있는 이미지 중심의 SNS인 스냅챗은 전송한 사진이 자동으로 삭제되는 서비스다. 스냅챗은 2015년 1월부터 SNS와 모바일에 최적화된 드라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디지털 환경에서 동영상이 주요한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는 맥락에서 텔레비전과 방송국의 영향력을 살펴야 한다. 텔레비전과 방송국은 한 세기를 지배한, 매우 익숙하고 절대적인 위치의 동영상 플랫폼이며 영상제작사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제까지 작품 뒤에 머물던 제작자나 작곡가가 대중과 연관되며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소비와 비평의 위치와도 연관된다. 이전 세기까지 비평은 작품의 해석과 이해를 돕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이 대중문화든 순수예술이든 비평의 권위는 시장이 아니라 산업적 이해관계라는 구조 위에서 쌓였다. 작가와의 네트워크나 아카데미즘의 어디쯤에 자리잡은 비평가란 그룹은 대중에 비해 작품을 가장 가까이에 존재함으로서 맥락을 파악하고 나아가 작품을 이해하고 그러므로 작가와 작품을 해석하는 역할을 도맡을 수 있던 것이다. 여기에는 창작과 비평이 비교적 엄격하게 구분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던 암묵적, 관습적 양해가 존재했다. 


특히 한국에서 비평은 90년대를 기점으로 그 양상이 변했는데 이 시기의 한국은 대중문화 산업이 고도화되던 시기였다. 영화도 음악도, 또한 방송을 비롯해 문학이나 미술 같은 예술 전반이 구조화되고 산업화되었던 시기. 이 맥락에는 87년 민주화 항쟁과 89년 해외여행자율화 조치, 그리고 일본문화 부분개방이라는 환경 변화가 작용한다. 한국은 87년 이후로 자유주의적 구조로 변했고 90년대와 함께 등장한 문민정부는 오래도록 한국사회를 지배한 군부독재와 결별하는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시장개방과 자유주의적 가치의 구현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성숙을 이끈 핵심적 배경이라고 할 때, 새로운 환경에서 탄생한 문화 생산물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 반응은 저널리즘의 비평 수요를 빠르게 늘렸다. 당시의 젊은 비평가들은 대부분 저널을 통해 등장했고 대중적 영향력을 얻었다. 이때의 ‘신진’ 평론가들은 주로 반자본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태도를 관철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기준이 종종 미학적 평가와 취향보다 우선된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중적 취향과 비평적 관점은 더 자주 괴리되었다. 이를테면 당시의 비평과 감상의 대립은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의 충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문예비평은 고압적이거나 위선적인 태도를 버리고 매끈한 구매 가이드로 다시 태어났다.


시민 사회를 건너 뛰고 소비자의 시대로 직행한 한국 사회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_한병철 [투명사회]


작품 그 자체의 자리를 찾기 위한 시도로서의 비평이 구매가이드로 전환된다면 새삼 중요해지는 것은 ‘소비자’다. 이전까지 영화의 관객이나 책의 독자 혹은 음악의 팬은 작품/작가와 모종의 긴장을 유지하던 존재였다. 그들은 작품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거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비했다.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작품의 소비에도 영향을 미치며 그 둘 사이의 긴장을 통해 어떤 열정이나 열기를 파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대중은 하루에 수천 종 씩 쏟아지는 제품 앞에서 쉽게 길을 잃는 소비자에 가깝다. 그들에게 구매가이드가 필요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해석의 전문가보다는 제작의 전문가가 더 유용하고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대중에게 신뢰받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들이 미학이 아니라 산업적으로 메이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박진영의 심사평이 종종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과 양현석, 유희열의 심사평이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그들이 만든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그들이 시장에서 거둔 성과가 더 많이 작동하는 걸로 보인다. 여기에는 시장에서의 성공이 곧 작품의 완결성을 보장한다는 대중주의가 깔려 있다.


이런 맥락에는 디지털 환경의 발달이 특히 중요하다. 한국은 그 어디보다 빨리 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한 국가다. 자원 없는 세계의 미래 전략으로서 디지털 콘텐츠는 21세기를 앞두고 경제위기에 빠진 한국 사회에 핵심이었다. 한국의 디지털 정책이 문화 콘텐츠 사업과 밀착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정보의 광범위한 공유와 대중 취향의 계발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정보는 콘텐츠로 전환되고 콘텐츠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해체적으로 보여주고 공유하면서 폭발적인 가치를 얻는다. 디지털 시대에는 투명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윤리인 것이다.


2000년 이후에 유독 음악의 음질을 따지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mp3의 시대에 음질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실제로 음향이 형편없어서라기보다는 소리의 가치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데이터 전송 속도인 초당 킬로비트(kilobits per second: kbps)가 mp3의 음질을 표시하는 단위로 여겨지고, 그 숫자가 높을수록 ‘음질이 좋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192kbps나 320kbps가 그 예다. 이런 투명성에 대한 가장 선동적이고 논쟁적인 지적은 한병철의 [투명사회]일텐데, 그는 21세기의 사회가 데이터 기반으로 재편되면서 사회의 메커니즘이 보다 명백한 것,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된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 투명성이야말로 획일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전까지 중요하게 여겨지던 이론(혹은 가설)은 컴퓨터로 수치화된 실증 데이터에 밀려난다. 요컨대 21세기의 소비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보와 데이터, 그러니까 ‘팩트’다. 누구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 동시에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싸이는 시대에 이 ‘팩트’는 그것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이전과 다른 가치를 얻게 된다.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팩트’가 곧 ‘진실’은 아닐 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의 속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과 그로부터 뭔가를 발견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 혹은 상식이 환기하는 것이 바로 소비주의다. 돌아보면 지난 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한국은 정신없이 소비사회로 이동했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는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바꿔놓았고, 그것이 지난 20여 년 간 확장된 결과가 2015년 현재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현상들이다. 소비주의는 시민 사회와 공동체가 있어야할 자리에 소비자를 채워 넣었다. 


모두가 소비자인 사회에서 권력과 자본은 세밀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작동한다. 누구나 ‘갑’이 되고 싶지만 역설적으로 영원히 ‘갑’이 될 수 없는 욕망의 순환 고리. 지난 세기 내내 한국은 이런 세계를 향해 ‘빨리빨리’ 나아가기만 했다. 그 종착지가 바로 철학 없는 테크놀로지와 문화가 배제된 산업의 확장이다. 철학과 문화, 혹은 역사는 빅데이터가 대체한다. 대중음악 시장이 디지털 중심으로 전환된 후 음악 산업의 수익 모델은 음악 판매가 아닌 저작권의 관리로 바뀌었다. 분 단위로 바뀌는 음원시장의 가변성은 역설적으로 음악 자체가 아닌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의 관리의 수요를 높였다.


이런 맥락에서 음악은 대량생산의 구조에 포섭되고 물량공세의 순환논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음악의 구매가이드로서 심사평이 강화되는 현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결과물과 그를 대하는 대중적 반응은 한국의 어떤 정신세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영화 그 자체, 음악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은 해설이다. 그리고 해설이야말로 소비자를 위한 가이드다. 소비자로서의 우리는 정치부터 교육, 행정, 노동, 공동체와 엔터테인먼트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서비스적인 가치를 요구한다. 최근에 [국제시장]이나 [토요일 토요일은 가요다]와 같은 엔터테인먼트가 자극하는 향수에 대한 비평에 대해 거의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비평가는 텍스트'나' 다루라는 요청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소비자로서 정당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비평적 핵심은 오히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과연 시민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묻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의 투명성이 지배하는 데이터 시대에 대중은 결과가 아닌 과정을 보자고 요구한다. 과정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그 과정을 통해 결과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유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신화적이다.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완전히 투명해질 수 없고 누구도 완벽한 관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역사는 19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리얼리티 쇼였던 1999년의 [빅 브라더] 이후 2000년의 [서바이버]와 2004년 영국의 [엑스 펙터]와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리얼리티 쇼는 바로 그 카메라의 권력을 시청자에게 나눠주는 것을 통해 폭발적인 대중성을 얻을 수 있었다. 애초에 ‘오디션’이란 [페임]이나 [플래쉬 댄스]와 같은 20세기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준 바대로 폐쇄적이고 사적인 이미지였다. 소수의 심사위원들 앞에 선 한 명의 참가자. 그가 오디션 무대에 올랐을 때 그 앞에 놓인 세계는 오직 참가자의 시야에 잡히는 범위에 한정된다. 그것은 타인과 공유될 수 없는, 또한 오디션 무대 밖과는 무관한 장소다. 저장되거나 공개될 여지가 없는 극도로 밀착된 경험이야말로 오디션이라는 용어가 야기하는 긴장감과 오디션이 끝난 뒤에 얻게 되는 유일한 성과였다. 심사위원의 권위는 그 폐쇄성 위에 존재했다. 지금은 아니다. 21세기의 오디션은 암묵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구도는 참가자 뿐 아니라 심사위원 마저도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노출시킨다.


내밀하고 사적인 경험의 총체였던 오디션은 21세기에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전송 가능한 콘텐츠 모델이 되었다.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플랫폼에서 콘텐츠로 전환된 오디션 프로그램은 시청자로 하여금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시청자로서는 냉정한 작가 관찰자 시점을 보장받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구조 아래 시청자는 심사위원과 거의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되고, 출연자들은 심사위원이든 참가자든 모두 캐릭터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해진다. 현재의 거의 모든 미디어에서 캐릭터가 강화되는 것은 그 콘텐츠의 과정을 노출할 때 캐릭터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정이야말로 디테일한 요소들의 집합이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다. 한 개인 혹은 결과물이 완결되는 과정으로서의 이야기.


따라서 21세기의 미디어가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과정의 디테일을 더 중시하거나 혹은 그 둘을 모두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투명한 엔터테인먼트가 끈질기게 강조하는 것은 친절함, 곧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 정신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시장에서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서비스 정신의 정수가 담기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의 우리는 좀 더 친절한 가이드를 원한다.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시장에서 작품을 에워싼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작품의 자리를 재설정하는 비평의 역할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요컨대 비평의 역할이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짐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는 데 있다면 이 복잡한 대량생산 시장에서 대중적 비평이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신형철의 문학평론이나 이동진의 영화비평이 그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나 작가를 향한 연서로 쓰이고, 그로부터 대중적 영향력을 얻는 현상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2015년 한국을 대표하는 두 비평가의 아름다운 문장과 사려 깊은 태도가 가장 중요하겠으나 그것이 핵심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술의 결과물이 세계와 만나는 장소의 21세기적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다시 [케이팝 스타]로 돌아오자.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 평가는 그 결과물에 대한 구매가이드로서 기능한다. 그런데 이것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평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예술적 결과물 전반에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 맥락에서 저널리즘이나 비평의 역할도 바뀌고 있다. 시장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세계에서 테크놀로지는 엔터테인먼트 혹은 디지털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한국은 이런 식의 사회 재편을 그 어디보다 빨리 진행한 경험이 누적된 공동체다. 


이 속도감은 기존 사회의 공동체적 경험을 재빨리 소비자 정체성으로 바꿔 놓았다.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비평이 구매가이드로 전환되는 데에는 이런 맥락이 흐른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디지털 환경이기에 가능한 변화다. 전통적으로 독립된 생태계의 경계는 사라진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평과 페이스북 좋아요 개수가 연관되고, 새로 출시되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추가 기능이 음악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넷플릭스의 새로운 정책이 한국의 저널리즘을 강타할 수도 있고, 예술가의 정체성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로 이동할 수도 있다. 물론 인간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조차도 희미해질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전환이다. 문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던 웹 소설의 성장은 ‘작가’와 ‘작품’의 개념을 넓고 깊게 흔든다. 온라인 저널리즘 분야의 ‘디지털 퍼스트’ 정책은 독자들의 글 읽기 습관이 변화하는 맥락을 반영할 뿐 아니라 저자의 글쓰기 방식도 바꾸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는 전환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지금이 약 6550만 년 전의 백악기나 18세기 말의 산업혁명기와 겹쳐지는 착시를 경험한다. 한 30년 정도 지났을 때 2010년 이후에 벌어진 온갖 변화가 우리 삶과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음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던 ‘무엇’이 30년 후의 세계에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너무 멀리 나갔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비평은 주관을 토대로 맥락을 구축하는 작업이고 그것은 대부분 실패할 것이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비평의 역할은 해석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패야말로 매끄럽고 투명한 세계를 꿰뚫는 상상력, 롱기누스의 창이다. 따라서 비평의 본질은 질문이어야 한다. 질문의 역할은 주체적인 독자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그렇다, 독자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평이라는 사소한 현상과 디지털 테크놀로지라는 광범위한 변화로부터 기어코 떠올리게 되는 것은 시장주의와 엔터테인먼트라는 세속성에 맞서는 주체의 재발명이다. | 2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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