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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Sep 06. 2017

대중음악과 세대:
90년대 신인류의 탄생과 취향공동체

[대중음악의 이해](2012) 2부 6장 대중음악과 세대 중에서 발췌

90년대에 대해서 말하려면 신세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정말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신세대 논쟁은 그때 이미 끝나버린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나를 포함한 '90년대의 아이들'이 현재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비주의 아래에서 팬덤을 확산시켰고, 탈정치와 미시정치의 복잡한 혼란을 겪었다. 문화적, 사회적 급변기였던 90년대에 10대를 보내면서 브랜드와 포지셔닝을 몸으로 이해했으며, 20대 이후에는 선진화된 산업구조(글로벌리즘)에 적응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도 마다않았다. 21세기를 자기계발과 소비자주의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들, 아니 '우리들'이야말로 그 첫번째 줄에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여전히 내게는 '90년대의 아이들'이 관심의 대상이고, 그 점에선 [대중음악의 이해]란 책에서 세대론 챕터를 쓸 때 거칠게나마 정리된 것 같다. 책에서는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리했는데, 일단 여기엔 90년대와 2000년대의 내용을 올려둔다. 

내 생각에 한국의 세대적 경험은 3년 주기로 바뀌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교과과정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10대 시절에 세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중학교 1학년은 초등 6학년과 의식적으로 단절되고,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1학년은 중3 시절과 단절된다. 이 단절의 경험(시끄러, 난 다 컸다고!!)이야말로 세대의 경험을 나누는 핵심적인 기준이 되지 않을까. 그 점에서 10년 주기의 보편적인 세대론과는 다른 개념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대중음악과 세대: 90년대 신인류의 탄생과 취향공동체

| <대중음악의 이해> 중 2부 6장에서 발췌 (차우진)


1990년대는 세대가 향유하던 문화의 차이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났을 뿐 아니라 문화적 경험의 차이가 짧아진 시대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중문화를 향유하던 청년 세대가 대학생과 고등학생 정도로 구분된 것에 비해 1990년대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향유하던 문화가 모두 달라졌다. 특히 1987년 전교조 설립을 경험한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로 대변되는 자의식 강한 10대로 자리 잡았다.


90년대적인 '어떤' 것


1961년부터 32년간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정권은 1992년 12월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문민정부 수립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1990년대의 중요한 문화적 변화들이 문민정부와 함께 했는데, 먼저 방송법 개정으로 민영방송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울방송(SBS)이 1991년 3월 20일에 개국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는 케이블 방송이 시험적으로 시작되었다(본격적인 방송은 1995년부터였다).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논의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는데, 1990년 출판부문을 부분 개방하며 1987년 <드래곤볼>을 필두(이 작품은 85~87년 사이 10대들을 대상으로 대규모로 불법 유통되던 대표적인 일본 출판물이었다)로 일본 출판 만화들이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아이큐 점프>와 같은 청(소)년용 만화 잡지가 출간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동인지 등이 10대의 하위문화로 자리잡았는데 이 하위문화 공동체는 PC통신으로 대표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확산되었다. 


<아이큐 점프> 창간호. (1989)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률은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를 보편화시켰고 1994년에는 나우누리, 1996년에는 유니텔이 가세하며 본격적인 PC통신 시대를 열었다. 사이버 공간에서 구축된 취향의 공동체는 영화와 음악을 비롯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SF소설 등의 대중문화의 하위 장르를 공유하고 향유할 뿐 아니라 창작과 비평이 자생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것은 적어도 IMF 체제로 전환되기 전까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배경일 것이다.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대중음악계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1992년 뉴키즈온더블록의 내한공연과 같은 해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잠실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뉴키즈온더블록의 내한공연에는 1만 6천 여 명의 10대들이 몰렸고, 안전장치도 없이 수용인원을 몇 배나 초과한 탓에 일대 혼란이 일었다. 그 와중에 한 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당시 언론은 ‘광란’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10대들을 엄중히 꾸짖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에 대한 반박과 비판이 거듭되며 이른바 ‘신세대’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뉴키즈온더블럭: 90년대 한국에서 벌어진 아이돌/신세대 논쟁의 발화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당시 미국 음악계의 최신 조류라고 할 수 있는 뉴잭스윙 스타일의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록 기타와 한국어 랩이 자유롭게 뒤섞이는 파격을 선보였다. 자유분방한 이미지와 직설적인 무대 매너와 그에 대한 열광적 호응이 신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야기했다면 이미 1990년에 데뷔한 공일오비의 3집 <The Third Wave>(1992)의 타이틀곡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히트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결혼 이야기>와 함께 신세대 연애관에 대한 담론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개인적이고 탈-정치적이며 소비지향적인 세대로 규정된 ‘신세대’는 이후 한국의 세대론에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했다. 


애초에 '신세대'란 말은 'X세대'와 혼용되던 용어이었다.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가 1991년에 발표한 소설 <Generation X: Tales for an Accelerated Culture>에서 처음 사용된 엑스세대는 ‘정의할 수 없는 세대’ 즉,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가치관과 문화를 거부하는 이질적 집단을 의미했다. 한국에서는 1973년 이후에 태어나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한 사람, 혹은 9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문화적 경험과 감수성을 지닌 20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마케팅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 용어로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파이자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한 세대, 경제적으로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었던 세대’로 정의되었다. 이런 X세대는 1993년 아모레 화장품의 남성 전용 화장품 광고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한 이후 1994년부터 신문기사와 인터뷰 등에서 기존의 신세대라는 용어를 대체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1991년의 소설 <제너레이션 엑스> 표지


이들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 정책의 실제 수혜자로서 배낭여행과 어학연수를 본격적으로 경험했을 뿐 아니라 1990년 이후 대중화된 개인무선호출기(삐삐)를 통해 소통하던 세대였다. 또한 TV드라마 <질투>와 <마지막 승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와 왕가위의 <중경삼림>을 동시대에 소비하며 새로운 대중문화의 감수성을 환영하고 확산시킨 주체기도 했다. 이런 세대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서태지가 고교를 중퇴했다는 점, 헤비메탈 그룹 시나위의 멤버였다는 점, 그리고 “교실 이데아”나 “필승”, “시대유감” 등의 곡을 통해 사회와 체제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뒤를 이어 1993년에 발표한 듀스의 데뷔곡 “나를 돌아봐”와 015B 4집의 타이틀곡 “신인류의 사랑”은 1990년대가 엑스 세대의 시대라고 선언하는 곡이었다면,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가요계는 그나마 장르별로 세대의 여러 취향이 각축을 벌이던 장이 무너지고 10대 청중을 겨냥한 댄스 음악이 다른 장르를 잠식하거나 지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1990년에 이미 뉴잭스윙을 표방한 현진영 1집을 발표하며 시대의 변화를 감지했던 이수만의 SM기획은 1996년과 1997년 H.O.T.와 S.E.S.를 연속으로 데뷔시키며 ‘아이돌’이라는 말을 유행시켰고 가요 시장이 10대 중심으로 재편되는 데 앞장섰다. 


동시에 장년층의 음악도 바뀌었다. 1990년부터 ‘뉴트로트’로 불리던 태진아의 “옥경이”, 김지애의 “얄미운 사랑” 등은 1993년 이무송의 “사는 게 뭔지”로 맥을 이으며 구세대와 신세대 모두의 호응을 얻었고, 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에 삽입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은 김혜연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는 댄스 트로트를 표방하며 1996년의 ‘신세대 트로트’라는 명칭으로 확장되었다. 90년대의 트로트는 새로운 흐름인 힙합 댄스 리듬을 수용하며 진화한 셈이다. 80년대의 하이틴 가수였던 김혜연, 진시몬 등이 90년대에 트로트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은 21세기에 장윤정과 박현빈의 등장으로도 이어졌다. 


<서울의 달>의 한석규, 최민식 (1994)


하지만 1990년대 가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승훈과 김건모다. 1990년 11월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한 신승훈은 1991년 2집의 타이틀곡인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SBS 인기가요에서 총 14주 동안 1위를 기록해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 1998년에 발표한 6집은 아시아 최단 기간 1000만장 돌파를 기록했다. 한국 최초로 정규앨범 연속 7장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신승훈은 조용필과 마찬가지로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싱어송라이터로 자리 잡았다. 그와 경쟁구도를 형성한 김건모는 1992년에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해 26세의 나이로 신인가수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 “핑계”와 1995년 “잘못된 만남”으로 신세대 가요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파격적이었다면 신승훈과 김건모는 1980년대에 형성된 클래시컬한 스타일의 발라드와 댄스음악의 형식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적절하게 선보이며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은 신승훈의 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화성이 주로 사용되면서도 독일어 인트로를 삽입해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발라드였다. 비극적 사랑의 감정에 취한 자기연민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1980년대의 변진섭이 유행시킨 발라드의 연장에 있기도 했다. 김건모의 “핑계”는 댄스 음악이면서도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행시킨 과격한 록 비트를 배제하고 레게를 도입해 중장년층도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음악을 선보였다. 여기에 김건모의 독특한 음색과 코믹한 외모와 언변은 기존 가요, 가수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데 기여했다. 두 사람은 1990년대를 통틀어 발라드와 댄스 음악의 지분을 나눠가졌는데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분화되고 특화된 음악 산업과 유리되고, 또 신승훈의 경우 국내보다 해외 활동의 비중을 높이며 국내 시장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김건모 1집 (1992)


물론 1990년대가 10대 중심의 음악시장으로 재편되었다고 해도 중장년층을 위한 음악은 소극장과 방송가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대표하던 김광석, 신촌블루스를 비롯해 민중가요와 언더그라운드의 경계에 위치한 안치환 등은 대학로의 소극장과 대학 축제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KBS에서는 1990년, 이런 흐름을 수용한 라이브 음악방송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를 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2012년 현재 <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맥을 잇고 있는데 1970년대에 포크 음악을 접하고 1980년대에 발라드를 듣고 자란 세대와 공명하며 10대 중심의 댄스음악과는 다른, 어쿠스틱 라이브 중심의 음악을 제공했다. 한영애, 신효범, 김광석, 정경화, 동물원, 전인권, 봄여름가을겨울 등이 주로 출연한 이 프로그램은 주류 가요들과 뚜렷하게 선을 그으며 ‘어쿠스틱 사운드의 진정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요컨대 '댄스음악은 삶의 진정성이 부족하고 가벼운 음악'이라는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당시 댄스 음악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관점과 거의 동일한 지위를 얻었다. 


한편 1990년대의 댄스가요 열풍은 갈수록 빨라지는 BPM을 견딜 수 있는 물리적 조건으로 대중음악의 수용자를 구분하도록 만들었다. 특정 연령대의 수용자들이 피로해서 듣지 못하는 음악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빨라지는 댄스 음악에 피로감을 느낀 이 시기의 30대들은 트로트가 아닌 포크와 록의 구매고객으로 다시금 부상했다. 이는 1996년 IMF 이후 찾아온 음반시장의 침체기에 ‘7080’시리즈로 명명된 편집앨범의 시장이 형성된 배경이기도 하다. 1995년 팝송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은 팝송 편집앨범인 <NOW> 1집이었다. 이후 등장한 <MAX> 시리즈와 함께 포크와 고고, 캠퍼스 록을 아우르는 대학가요제 수상 곡들과 80년대 발라드를 총망라한 <명작>시리즈가 등장했고 이어서 <걸작> <보석> <추억 만들기> <고고박스>등의 시리즈가 연달아 발매되었다. 이 편집앨범들은 1990년대 후반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2002년의 <연가>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미연의 <연가> 시리즈. 당시 코어콘텐츠미디어 김광수 대표의 기획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1990년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10대 구매층의 발견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한편 1970년대 포크와 록을 경험한 세대가 구매력을 가진 중장년층으로 성장하며 기존의 음악적 세대를 구분 짓던 트로트 시장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대중음악과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화적 경험은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며 또한 음악 산업이 새롭게 부상한 구매층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며 구매력을 유지할 수단을 찾는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 관점은 2010년을 전후로 불기 시작한 ‘세시봉 열풍’과 ‘90년대 가요’의 유행, 그리고 오디션 프로그램과 리메이크 제작의 유행에도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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