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백 투 더 케이블 | 유선씨의 백 투 더 케이블
2007.04.05에 퍼블리싱된 기사. tvN 개국에 맞춰 한국 케이블 방송의 역사를 정리했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이 즈음부터 질적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유선(有線)씨(Mr. Cable)는 소파에 몸을 묻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그날 방송을 시작한 24시간 연예 전문 채널의 개국 방송을 보고 있었다. 종합 엔터테인먼트 전문 채널을 표방한 tvN 채널이 개국하면서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음악 전문 채널(KMTV)이 없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없어진 게 아니라 위성 방송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지만, 위성 채널을 보지 않는 유선씨에게는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하나도 아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차이는 케이블 방송과 위성 방송의 차이만큼이나 미묘하면서도 분명했다.
어쨌든, 유선씨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케이블TV와 함께 살아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던 것이다. 그 10년 동안 유선씨는 오래된 연인과 지내듯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심드렁하게 케이블TV와 함께했다. 이를테면 그의 20대는 케이블TV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유선씨는 맥주를 꿀꺽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들었다. 잠깐, 우리는 바로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DMC-12 드로리언의 운전석에 앉아 멋모르고 시동을 걸다가 과거로 날아간 <백 투 더 퓨처>의 마티처럼, 유선씨는 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케이블 네트워크의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일곱 빛깔 무지개 색 당구공이 아름답게 굴러다니는 포켓 당구와 가볍게 ‘돌려 따는’ 밀러 병맥주가 히트하던 시절, 학교 앞 호프집에서 헐렁한 박스 티셔츠와 물 빠진 게스 청바지, 가운데 가르마 머리를 한 스무 살의 유선군은 자리에 앉아 TV 브라운관을 가득 채운 뮤직비디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비스티 보이즈의 ‘사보타지’가 흐르는 화면 위로 최할리가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뮤직 비디오 감독인 스파이크 존즈를 소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최할리나 재키림, 이기상 같은 이들을 비디오자키(VJ)라고 불렀다. VJ는 오로지 케이블 방송 때문에 생겨난 신종 직업군이었다. 집에서 케이블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대학가의 대형 호프집이나 세련된 카페에서는 의무인 것처럼 케이블 채널들을 틀어놓았다. 듀스가 해산되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1995년은 음악 전문 채널을 선두로 한국에서 본격적인 케이블 시대가 열린 해였다.
1995년 1월 5일 오전 10시, 21개 PP(Program Provider: 방송채널사용사업자)와 39개 SO(System Operator: 종합유선방송사업자)의 시험방송이 일제히 개시되었다. 한국 케이블 방송의 시작이었다. 2월 최초의 음악 전문 방송인 M.net이 개국했고 동아TV가 그 뒤를 이었다. 1995년 미스코리아 선(善)인 김정화가 미스 케이블TV로 선정되었다. KMTV에서는 뮤직스타 선발 대회를 개최했고, 동아TV에서는 95 미시 탤런트 선발대회를 열었다. 홈쇼핑 TV와 투니버스, YTN 등이 일제히 개국해서 케이블TV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 글에서 ‘케이블’이라는 용어는 PP를 일컫는다*)
유선씨의 첫 연애의 종말은 IMF와 함께 왔다.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사랑도 가난해진다는 것을 유선씨는 그때 배웠다. 공중파에서 대국민 금 모으기 이벤트가 벌어지는 동안 유선씨는 박찬호와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살았다.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는 메이저리거 찬호 박의 위풍당당함과 시저탱크로 저그들을 몰살하는 손맛은 실연의 아픔을 없애주는 스팀팩이었다.
1996년 DCN과 매일경제TV, 캐치원 등은 본격적으로 24시간 방송을 시작했다. 1997년에는 아리랑 TV가 개국했고, 투니버스에서 최초로 게임 플러스를 방송했다. 98년 8월 사이버 프랑스월드컵을 한국 최초로 방영한 게임 플러스는 2000년 2월 온게임넷으로 발전했다. 1998년 ‘가짜 보석 사건’으로 일부 홈쇼핑 채널들이 허위 광고로 고발되었고 처음으로 방송 제재를 받았다.
유선씨는 사회면 1면을 장식한 ‘사상 최악의 실업률’이란 헤드라인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500:1의 경쟁률을 뚫고 방송국에 취직하려는 자신이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다. 실연의 상처를 핑계로 PC방을 전전한 것은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면접관이 부디 스타크래프트 마니아이기를 바랐지만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500:1의 경쟁률에서 499명에 포함된 유선씨. 그 유명한 ‘이태백’이 되어 24시간 무비 피플로 영화 채널만 가열차게 돌리다.
M.net은 MTV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MTV는 2001년에 한국지사를 설립한다). DCN은 동양그룹에 인수된 후에 OCN으로 개명하고, 투니버스는 타임워너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아리랑 TV는 8월부터 해외 위성방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9월에는 48여개의 디지털 위성 방송 채널을 공급하며 동아시아 일대를 커버할 수 있는 통신위성 ‘무궁화 3호’가 발사되었다. 같은 달, 일본 대중가요 개방 정책으로 일본 뮤지션들의 공연이 허용되었고 동양그룹은 11월, 최초의 MPP(Multi Program Provider, 복수방송채널사용사업자) 브랜드인 온 미디어를 개국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이태백을 접고(먹고 놀 때가 좋았단 얘기다) 작은 회사에 취직한 유선씨, 직장 동료들과 빨간 머리띠를 묶고 서울시청 앞에서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막론하고 모든 TV는 월드컵만 얘기했다. 심지어 게임, 푸드, 음악, 만화 채널들까지도 앞다투어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들로 도배했다. 축구에 무관심한 유선씨의 여자친구(상처는 낫기 마련이고 새로운 연애는 시작되는 법)는 한국의 첫 경기 폴란드전을 응원한 이후 예상대로 ‘월드컵 과부(worldcup widow)’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월드컵 일색인 공중파 대신 몇 개의 케이블 채널들을 선택했다. 거기에서는 축구 경기 대신 드라마와 영화가 하루 종일 나왔기 때문이다.
월드컵 과부들을 위해 몇몇 케이블 채널들은 스포츠를 배제한 프로그램을 편성해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아리랑 TV는 <기파이터 태랑> <아이싱> <결혼의 법칙> <라이브 토크쇼-하트 투 하트> 등을 하루에 2, 3번씩 틀었고, Q채널에서는 <논픽션 시네마 시리즈>와 <이것이 인생이다> <추상미의 헐리우드 커플>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 등을 종일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 2001년 8월, OCN을 통해 국내 처음으로 <CSI>가 방영되다.
2004년 3월 초유의 대통령 탄핵 정국에도 흔들림 없이 연애에 매진한 유선씨, 결혼에 골인하다. 적립식 펀드와 종신보험을 위해 매일같이 야근에 빠져 사는 이들 부부에게 케이블TV는 차라리 신의 축복이었다. 부부는 거의 매일 밤 지독히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리모컨 주도 싸움을 벌였지만 안타깝게도 유선씨는 거의 항상 아내에게 리모컨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절박한 법이고 그녀는 마침 온스타일에 완전히 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리적으로 <섹스 앤 더 시티>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 더 많은 정을 주던 유선씨가 마놀로 블라닉이 구두 브랜드라는 사실을 배운 건 순전히 아내 탓이었다.
2004년 2월, 온스타일이 개국하다. 온스타일은 미국 케이블 HBO를 통해 1998년부터 6년간 평균 시청률 21.8%를 기록했던 <섹스 앤 더 시티>를 간판 프로그램으로 내걸고, 또한 국내 최초의 리얼리티쇼인 <싱글즈 인 서울>을 제작하면서 2, 30대 여성들의 다른 감수성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같은 해 투니버스는 일본 선라이즈가 제작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방영, 미취학 아동들로부터 일부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시, 2006년이다. 리모컨을 한 손에 쥔 채 소파에 앉은 유선씨는 무심결에 시계를 들여다봤다. 째깍,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맥주는 여전히 차가웠고 케이블TV에서는 <로스트> 시즌2의 예고편을 내보내고 있었다. 유선씨는 잠깐 꿈을 꿨던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는 어느새 <로스트> 시즌2와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 그리고 <K-1 KO 퍼레이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문득 유선씨는 2006년은 자신에게 더 없이 풍족한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케이블TV와 함께 한 10여 년 동안 그는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24시간 연예 전문 채널 같은 게 튀어나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초기 VJ였던 김형규가 치과의사도 되고 김윤아와 결혼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은 새삼스럽게 그의 인생이 별로 남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은 아내를 만난 것이었다. 온스타일 마니아인 그의 아내 말이다. 유선씨는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2005년 YTN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란 관련 단독보도로 공중파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스포츠 전문 채널들의 약진은 신생 X-PORTS의 메이저리그 독점 중계권을 필두로 K-1 경기를 중계한 MBC ESPN의 케이블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평균 23%) 2차례 갱신, 박찬호의 등판 경기에 맞춘 대기업 광고의 등장 등으로 이어졌다(박찬호 효과를 직접적으로 본 것은 송월타월이었지만, 이후 대기업들을 케이블 광고 시장으로 유입시킨 결과로도 작용했다).
또한 2006년에는 <CSI>와 <섹스 앤 더 시티>로부터 <앨리 맥빌> <로스트>, 그리고 <위기의 주부들>까지 이어진 외화 드라마의 인기로 외화 편성력에 있어 케이블이 공중파 방송사를 이미 앞지르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케이블 방송 산업 내부에서는 디지털 방송과 IPTV가 화두로 등장해 케이블과 공중파 방송사의 세력 다툼으로 확장되기도 했고, 케이블TV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제정된 2000년 통합 방송법과 2004년 방송법 개정안에 따라 기업 집중화가 새로운 수익 전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 결과 거대 MPP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국내 케이블 방송 시장은 CJ미디어(12개 채널)와 온미디어(13개 채널) 양대 산맥이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2006년은 비로소 케이블 방송과 공중파 방송의 경쟁이 가시화된 해로 기록될 것이다. TV뿐 아니라 인터넷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하는 양방향 TV와 종합 디지털 방송, IPTV나 위성 방송과 같은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한) 뉴미디어 분야에서도 이런 경쟁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글) 차우진 lazicat@t-fac.com / (일러스트레이션) 양경민(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