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는 게임의 룰을 바꿨습니다. 어떻게 바꿨을까요?
0. 빌보드의 공식 기사로 방탄소년단, 아니 BTS의 [Love Yourself: Tear]가 앨범 차트 1위를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또한 싱글 차트에서는 "Fake Love"가 10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입니다. 결론적으로 BTS는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이그룹'이 되었습니다. 명백하게 대단한 성과죠. 이에 대한 국내의 관점은 대략 두 가지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한국 음악의 빌보드 차트 진출/점령’. SM도, JYP도 못한 걸 빅히트가 해냈다는 맥락으로 국위선양의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서브컬쳐로 여겨지던 K-POP이 주류 문화로 편입되는가?'입니다. 이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보다는 기존 팝 시장의 성공 법칙을 바꾼 ‘게임 체인저’로 BTS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제 질문은, BTS의 성공 사례가 누구에게 인사이트를 줄 수 있을까? 입니다. 구체적인 자료를 언급한다기보다는 경험과 직관으로 정리한 내용이니, 여러 관점 중 하나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일단 최근 미국 음악 시장의 구조부터 보죠. 21세기 이후, 디지털 환경에서 빌보드의 앨범 차트(핫 200)와 싱글 차트(핫 100)는 각기 다른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싱글 차트는 에어플레이+다운로드+스트리밍을 반영하면서 음악의 실제 소비량을 측정하는 지표가 됩니다. 앨범 차트는 피지컬 및 디지털 음반 판매량이 포함되는데, 앨범 단위의 소비가 크게 줄었고 동시에 한 아티스트의 싱글/앨범 발매 시기도 다르므로 실제 시장에서의 인기보다는 음악 산업에서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선 오래된 음악가(레전더리 뮤지션)의 공연이 앨범 차트에 갑자기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정확한 측정 지표나 가이드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 개의 차트에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해당 음악가가 미디어에 얼마나 노출되느냐라는 사실입니다. 대중 음악은 애초부터 매스 미디어와 밀착되었지만, 마이크로 미디어가 보편화된 21세기에는 그 밀도가 더 높아졌습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해진 시대, 맞습니다.
2. BTS는 마이크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그룹입니다. 이것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돌파로 증명된 한국 문화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전례가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미 저스틴 비버가 유튜브에서 특정 세대의 인기를 얻은 다음, 시청률이 높은 오디션 프로그램(=아메리칸 아이돌)에 출연하고, 그것이 트위터의 대규모 바이럴 효과로 연결되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는(=판매량을 높이는) 순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뉴미디어 마케팅의 선구자는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스쿠터 브라운일 겁니다. 그는 유튜브와 트위터, 그러니까 21세기형 뉴미디어의 영향력을 초창기에 발견하고 그 파괴적 가능성에 집중한 인물인 거죠.
비슷한 시기에 글로벌로 영역을 확장한 K-POP은 오히려 이런 소셜 미디어 마케팅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던 걸로 생각합니다. 마케팅보다는 음악적 완성도로 해외 시장을 돌파하려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시로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쟁력이 생겼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엔 꽤 많은 조건과 제약이 작동했습니다) 지금의 성과는 양질전화의 결과입니다.
3.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BTS의 기반은 한국식으로는 아이돌, 영미권식으로 말해서 보이밴드(=보이그룹)의 카테고리일 겁니다. 나중에는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현재로서는 록 밴드나 힙합 음악가들과는 다른 시장에 속한 셈이니까요. 멤버 구성, 음악적 특징 등도 그렇지만 특히 미디어 활용에 있어서 21세기의 보이그룹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4. 21세기에 등장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이그룹'은 웨스트라이프와 원 디렉션인데요, 이 둘의 교집합은 [엑스 펙터]라는 영국의 TV프로그램입니다. [엑스 펙터]는 2004년에 시작된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팝 아이돌]이라는 장수 오디션 프로그램의 후속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엑스 펙터]의 탄생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독설가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입니다. (그는 두 프로그램의 제작자로서 각각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이먼 코웰의 절친(?)은 [엑스 펙터]에서 함께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루이 월시인데요, 그는 원래 보이존의 매니저로 활동하던 중에 웨스트라이프를 발굴한 프로듀서로 유명합니다.
2012년까지 활동한 웨스트라이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이그룹'은 2011년에 데뷔한 원디렉션이었습니다. 원디렉션은 [엑스펙터] 출연자들로 구성된 보이그룹으로, 처음부터 사이먼 코웰이 기획해 자신의 레이블 '사이코(Syco)에서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5. 정리하자면, 2000년부터 2016년까지 웨스트라이프-원디렉션으로 대표되는 보이그룹의 역사는 루이 월시와 사이먼 코웰로 수렴됩니다. 다만 활동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성공의 방식도 다른데요, 가장 큰 차이는 팬덤입니다. 웨스트라이프는 사실 비틀스 이후 영국 음악가들이 미국에 진출하는 방식을 거의 답습했습니다. 로컬에서 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앨범/싱글을 매스 미디어와 믹스해서 UK 차트에 진입하고, 그걸 기반으로 미국으로 진출합니다. 이때 미국의 매스 미디어에 소개되는 건 필수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원디렉션은 좀 달랐습니다. [엑스 펙터]는 이미 영어권 국가에서 높은 인기를 얻던 프로그램이었으므로 결성과 동시에 글로벌한 수준의 팬덤이 구성되었는데요, '다이렉셔너'라고 불리는 원디렉션의 팬덤은 그들의 월드 투어(=미국+호주+일본) 매출을 보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6. 원디렉션과 비슷한 때에 저스틴 비버도 등장합니다. 이들의 팬덤은 모두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BTS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는 SNS 활용도 이런 맥락에서, 그러니까 글로벌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이렉셔너'는 트위터로 다른 국가의 팬들과 소통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시아의 팬들과 소통하더라도 영어를 제2국어처럼 쓰는 곳들이었습니다.
요컨대 사실상 웨스트라이프, 원디렉션, 저스틴 비버의 성공에는 영국의 식민 지배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권에 놓인 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점, 즉 '영어권'이라는 조건에서 가능한 사례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20세기 영미권 팝 컬쳐의 글로벌한 성공 조건이기도 합니다만.)
7. 미국은 로컬 트렌드가 전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사실상 비정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입니다. 미국의 시장 규모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데요, 그러다보니 미국 내 트렌드가 곧 세계 표준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저는 이게 일종의 착시효과를 주기도 한다고 봅니다. 사실 미국의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다른 국가의 대중 문화에 대한 큰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이지도 않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심화되는 내부 경쟁의 결과로 주도권을 나눠갖는 구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무척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만) 195~60년대에는 백인 중산층을 기준으로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이 미국 주류 문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이후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흑인 노동계급 청년 문화와 백인 노동계급 청년 문화가 주류 헤게모니를 두고 다퉜고, 2000년 이후에는 히스패닉 노동계급 청년 문화와 아시안 중산층 청년 문화가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하며 경쟁하는 구도가 출현했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각각 매거진과 라디오와 케이블 채널(=MTV), 그리고 인터넷(=유튜브)이 핵심적인 미디어로 기능했다고 보는데요, 이런 현상은 사실 미국내 인종 분포도와 관계가 깊습니다. 히스패닉의 인구수가 흑인과 맞먹을 정도가 된 게 2000년대 초반인데, 그즈음부터 미국의 대중문화 곳곳에서 스패니쉬를 접했던 게 우연은 아닙니다.
8. 그런데 BTS도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을까요? 미국 내 아시안(혹은 코리안)의 비율이 높아져서 이들의 인기가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고요. 싸이의 성공에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와 '유머러스한 호기심'이 기여했다면, BTS의 성공에는 '쿨(cool)'이 관여한다고 봅니다. 2010년 전후로 해외에서 소비되는 K-POP은 청년 세대에게는 꽤 '쿨'한 문화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때 '쿨'이란, 어른은 모르는(=이해하지 못하는) 새롭고 낯선 감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BTS가 플레이하는 경기장은 미국내 아시안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장(field)이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가 주축인 뉴 노멀(new normal) 라이프스타일의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은 기존에 인종과 언어로 나누던 경계가 흐릿해지는 곳인데요, 여기엔 21세기의 테크놀로지와 미디어가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실시간 업데이트와 자동 번역이 일상화된 세계요.
9. 주류 대중 문화는 원래 구세대와 신세대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정립될 수 있습니다. 청년 세대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부모 세대가 아닌 동시대의 가치관에서 찾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전 시대에는 그것이 주로 물리적인 토대에서 진행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부터는 비물리적 토대에서 이뤄진다고 봅니다.
제가 20대이던 90년대에는 한국을 벗어나려면 일단 고급 영어 학원을 다니고 유학 준비에 몰두할 수 있는 경제력과 해외의 좋은 학교를 고를 수 있는 정보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외국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 정도의 조건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경제력과 정보력을 비롯해 자기를 정의하는데 언어, 국가, 인종 등의 조건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시대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가상 현실과 인공 지능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낮추고 있죠.
10. 따라서, BTS의 성공은 특히 비영어권 음악 관계자들에게 무척 고무적인 사례가 될 거라고 봅니다. 웨스트라이프, 원디렉션, 저스틴 비버가 등장할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해낸 셈이니까요. 바야흐로 로컬의 크리에이티브가 메인스트림을 돌파할 가능성을 높여준 거죠. 이게 가능한 조건은?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혁신,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 덕분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이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 생각엔, 앞으로 이런 사례들은 더욱 빈번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빌보드 차트가 이제까지 누려오던 '글로벌하고 단일한 지표'라는 영향력은 약해지리라 봅니다. 시장은 더 작게, 개인에 밀착된 형태로 쪼개질테고, 미디어 역시 더욱 복잡해질테니까요. BTS의 성공은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입니다. 콘텐츠 업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신한 전략이 더 많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징후이기도 할 겁니다. 새로운 쿨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습니다. | 차우진_201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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