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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May 12. 2021

존재로서의 메시지: girl in red

If I Could Make It Go Quiet (2021)

노르웨이의 싱어송라이터 마리 울벤의 프로젝트 ‘걸 인 레드’는 현재 가장 유명한(그리고 가장 성공한) Z세대의 아티스트다. 1999년에 태어난 그는 자기 세대의 방식대로 활동하고 성과를 낸다. 10대 초반에 인터넷으로 작곡과 편곡, 레코딩을 배웠고, 그렇게 만든 음악을 사운드클라우드와 유튜브에 올렸다가 소위 대박이 났고, 소셜미디어에 다양한 국적의 팬이 생겼으며, 스포티파이를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레이블을 만들고 인디펜던트 전문 유통사와 협업하는 등 일련의 흐름이 모두 동세대와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2020년 이후 록 음악의 새로운 국면을 상징한다. 음악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메시지인 셈이다. 단적으로 2021년 1월, 두 곡의 싱글 "I Wanna Be Your Girlfriend"와 "We Fell in Love in October"가 RIAA(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로부터 골드 인증을 받았는데, 지금의 음악 팬들에게 이런 권위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스포티파이의 월간 청취자가 1천만 명이 넘는다거나(정확히는 10,450,721명이다), "I Wanna Be Your Girlfriend"의 유튜브 조회수가 2천만 뷰가 넘는다는 사실이 그의 영향력을 더 정확하게 설명할 것이다.


무엇보다 걸 인 레드는 퀴어 정체성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걸 음악 활동에 이용하지도 않는다. 틱톡에서 “Do you listen to girl in red?”라는 질문이 성정체성을 묻는 뜻으로 쓰일만큼 그의 음악과 퀴어 정체성이 직접 연결되어 소비된다고 해도, 정작 그의 음악적 성과를 성정체성과 연결하려는 미디어의 질문(혹은 성정체성에서 그의 음악적 성과를 발견하려는 욕망)에 대해 그는 늘 “내겐 부차적인 문제다. 너무 평범한 거라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야말로 그의 음악적 방향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새삼 중요한 건 성정체성이 아니라 가치관이다.

girl in red - Serotonin

이런 맥락에서 걸 인 레드의 정규 1집 <If I Could Make It Go Quiet >의 음악적 정체성을 쉽게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피니어스 오코넬과 공동 프로듀싱한 첫 곡 “Serotonin”은 시원하게 미끄러지는 감각이 일품인 기타 팝이고, “Body and Mind”는 끈적거리는 네오 소울에 가깝다. “hornylovesickmess”는 깡총거리는 건반을 따라가는 인디 팝, “You Stupid Bitch”는 90년대 스타일을 재현하는 펑크 록이다. “Rue”와 “Apartment 402”는 클라이막스에서 한꺼번에 터지는 애수로 가득한 팝이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it would feel like this”는 틴에이저를 다룬 독립영화 OST에 어울릴 법한 1분 20초의 연주곡이다.


앨범의 타이틀이자 첫 곡인 “Serotonin”은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밝고 경쾌한 멜로디 안에 따끔한 우울을 숨겨둔 이 노래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 부정적인 생각, 약물과 상담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풀어놓는다. 한편 “Did You Come?”은 즉흥적이고 유혹에 약한 파트너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담지만, “Body And Mind”는 내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과 무력감을 털어놓는다.  


“hornylovesickmess”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도 육체적 사랑에 집착하는 엉망진창인 상태를 고백하는 자학적인 노래고, “You Stupid Bitch”는 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상처받는 누군가에게 나야말로 네게 완벽한 사람이라고 돌직구를 날리는 고백 송이다. 그리고 “Rue”는 2019년 HBO의 화제작 <Euphoria>의 주연 캐릭터인 루(<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MJ로 유명한 젠데이아가 연기했다)에 대한 노래로, 드라마와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girl in red - rue

어쩌면 이런 비정형적이고 제멋대로의 구성을 (긍정이든 부정이든) ‘신인 아티스트의 혼돈’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걸 인 레드가 존재 자체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인’이라는 포지션이 아니라 ‘아티스트’라는 정체성 때문이다. 


그는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지만 거기에 포섭되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음악적으로도 다양한 장르를 왔다갔다 하면서 록과 팝, 대중음악을 관습적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무엇보다 가장 자본집약적인 시장에서 가장 인디펜던트한 방식으로 활동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신의 내면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직하게 드러낸다. 


요컨대 걸 인 레드는 너무나 제멋대로이고, 바로 그 ‘제멋대로’인 점 때문에 독특하면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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