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 - 좀 걷자(feat. 개리) | 그니, 2013
정인의 [그니]는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여성 보컬 앨범이다. 개성적인 보컬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리쌍의 데뷔곡이었던 “Rush”에서의 그 시너지가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앨범은 그 아쉬움을 덜어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개리가 작사하고 윤건이 작곡한, 아스트로 비츠가 편곡한 “그 뻔한 말”의 담담한 톤이 인상적이다. 차트 성적도 좋은 편인데, 아무래도 감정의 비약과 폭발의 호소가 대중적인 환기를 야기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곡보다 “좀 걷자”를 더 좋아한다. 가벼운 터치의 건반 인트로를 지나 산보하듯 진행되는 노래가 정작 ‘헤어질까 말까 우리 어떡할까’인 것도 마음에 든다. “좀 걷자 우리”, “술 먹자 우리”처럼 친근하게 시작되는 도입부도 매력적이다.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와 리쌍의 개리가 가사를, 개코와 장재원이 곡을 쓴 노래다.
좀 걷자 우리 마음도 복잡하니 마주 보고 있는 게 더 지치는 것 같아 왠지
어떻게 할까 우리 헤어질까 우리 다시 시작하는 게 좀 겁나는 것 같아 난 왠지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끝이 보이는 것 같아도 쉽게 매듭질 수 없어서
미련 때문인 건지 도대체 답이 안 나와서 이렇게 고민 고민 고민 또 고민 고민 고민해
술 먹자 우리 머리도 복잡하니 얘기가 자꾸 겉도는 게 난 더 못 참겠어
조금 오른 술이 날 더 헷갈리게 해 (마주 앉아) 바라보다 바보처럼 또 웃게 돼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끝이 보이는 것 같아도 쉽게 매듭질 수 없어서
미련 때문인 건지 도대체 답이 안 나와서 이렇게 고민 고민 고민 또 고민 고민 고민해
이별도 사랑하는 거 그것만큼 쉽지 않아 취한 채로 우린 계산하고 나왔지만
아직도 맘 못 정하고 우리 사랑은 맴돌고 있어
(feat. 개리)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것들도 너한텐 쨉도 안 됐지
향기나는 꽃들도 부드러운 음악의 선율도 값비싼 선물도
다 좋았어 너라면 무조건 다 버렸어 너 빼고 모든 걸
근데 그 사랑이 요즘 주춤해 하루에도 몇 번 씩 “우리 이쯤 해” 꺼내다 마는데
니 모습이 예전처럼 내겐 섹시하진 않은데
자꾸 나쁜 생각만 하는 내 맘은 널 원하지 않는 것 같아
예전과 달라 이젠 끝인 것 같아 너와 난 이젠 끝인 것 같아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끝이 보이는 것 같아도 쉽게 매듭질 수 없어서
미련 때문인 건지 도대체 답이 안 나와서 이렇게 고민 고민 고민 또 고민 고민 고민해
이 연인은 잘 헤어질 것 같다
“좀 걷자”의 테마는 위기의 연인이다. 이 관계가 끝장나는 것을 지켜보는 와중에 마음도 복잡하고 머리도 복잡하고 그런데 하필 또 둘이 술은 마셨겠다, 이대로 괜찮은가 싶다가 또 이건 뭔가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마음은 헷갈리고 결정도 못하고 애매한 채로 술집을 막 나왔을 때의 스냅 사진이다. 이 노래의 장점은 가사가 묘사하는 풍경이 수십 컷으로 편집된 영화의 장면처럼 디테일하다는 데 있다. 연극이라면 방백으로 처리되었을 이 노랫말은 여자와 남자의 내면을 헤집으며 종말을 앞둔 관계의 흐릿함을 포착하려 애쓴다. 재밌는 건 여자의 고민이 구체적이지 않은 반면 남자의 태도는 비교적 선명하다는 데 있다.
여자는 ‘복잡하다’는 것 이상의 단서를 주지 않지만 남자는 ‘예전처럼 섹시하지 않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 차이는 관습적으로 고정된 성차이기도 하고(이른바 여자들은 ‘내 마음 나도 몰라’, 남자들은 ‘예쁘면 다 좋아’ 같은 구도로 정형화되는데, 특히 유행가에서 이런 정형이 엄격히 적용된다), 동시에 여성의 복잡함을 더 강조하기 위한 장치가 되기도 하는데, 이 곡의 은근한 인기는 아마도 이 두 가지 면이 서로 적당히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적인 감각이란 특수성보다 보편성에 더 가깝고, 그럼에도 구태와 차별되는 개성을 구현할 때 얻어지는 수혜이므로 디테일, 요컨대 묘사의 성실함은 그걸 가장 쉽게 구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아, 나도 한 번 쯤은 그랬었네’라 생각하게 된다. 경험과 관찰로 구축된 보편성은 그렇게 작동한다.
자, 이때 중요한 건 이 지리멸렬한 관계가 결국은 쫑나게 될 것이란 점이다. 스스로 ‘미련’이라고 규정한 관계에 밝은 미래는 오지 않기 때문인데 복잡한 채로 맴도는 사랑이 피로하고 귀찮고 애매할 때, 오케이 그래 깔끔하게 싹 다 정리하는 게 서로를 위해 좋겠다는 생각도 들 수 있으리라. 심지어 여기선 둘 다 정리해야할 때가 왔음을 ‘좀 걷는 중’에 직감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막 안타깝고 절절하진 않다. 오히려 여기 두 사람은 잘 헤어질 것 같다. 어쨌든 자신의 내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질 수 없어, 웃으며 보내줄게, 날 떠나서도 잘 살기를, 행복을 빌게, 널 끝까지 저주하겠어 따위의 마음이 아니라 천천히 식어가는 관계의 열기를 응시하면서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이 행위가, 마침내 관계를 통해 성장하도록 도우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다시피, 잘 헤어지는 게 뭔가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좀 걷자”는 안쓰러운 관계의 쓸쓸함을 보듬고 서로를 응원하는 곡, 역설적으로 희망적인 노래가 된다. | 2013.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