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우진 Jul 24. 2017

욕망의 거처

아침 - 스윗 식스틴 | 2013

열여섯 살은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다. 그 시절에 뭘했더라, 23년 전이라 까마득하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억들은 남아있다. 당구를 배웠고 술집에서 처음 술을 마셨다. 학교 가는 버스에서 마주친 단발머리 소녀에게 긴 편지를 썼고, 키가 큰 다른 학교 여학생한테선 집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뒷자리에서 매일같이 짖궂은 장난을 걸어대던 덩치 큰 녀석에게 마침내 주먹을 날렸고, 야간 자율학습을 째고 담을 넘기 시작했다. 아하(A-Ha)와 부활, 시나위, 서태지와 아이들,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음악을 정철영어회화 테이프에 녹음해 아이와 워크맨으로 들었다. 담배는 고1때 배웠는데 당구장에서 간신히 100으로 올린 ‘다마’를 칠 때 입에 꼬나무는 걸 좋아했다. 대체로 시시한 것들이다. 평생 키스 한 번 못해볼 거라는 생각에 우울했다. 어른 흉내를 내던 꼬꼬마니까 당연했다.


열여섯은 청소년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나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법을, 여러 논쟁적인 지점에도 불구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청소년이라는 말이, 그러니까 이런 범주화가 곧 이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한다. 이름 붙이는 것이 늘 그렇듯, ‘우리’(는 사실 복잡한 개인의 집합일 뿐임에도 쉽게 쓰는 ‘우리’)는 종종 이런 식의 ‘네이밍’과 ‘라벨링’으로 누군가를 쉽게 배제하거나 쉽게 포섭한다. 이때 우리 밖의 ‘저들’은 내가 모르는, 알 수 없는, 경험하지 못한 집단이 된다.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 연쇄살인범, 성매매종사자, 동성애자, 깡패, 팬덤, 그리고 여성, 노인, 어린이, 청소년. 물론 그들이 이 집단정체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바뀔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회적 한계, 할 수 없는 것들을 실감하며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게 된다. 이런 구조로 움직이고 작동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늘 ‘저들’을 경계하고 감시하며 안전한 장소를 유지한다.


학교 가기 싫어요 놀고 싶어요
망가지고 싶어요 도와 주세요
밤은 아직 길어요 꿈을 주세요
거짓말로 속여 주세요

나를 알아 주세요 나를 봐 줘요
구석 구석 꼼꼼히 괴롭혀줘요
나는 아직 어려요 잠들 때까지
상냥하게 대해 주세요

아임 스윗 식스틴
시들기 전에 꺾어주세요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주세요

이곳은 너무나 어지러워요
하지만 너무 재밌어
너무나 어지러워요
내 손을 놓지 말아 주세요
‘저들’에게도 나처럼 욕망이 그저 거기 있을 뿐이라는 것


아침의 “스윗 식스틴”은 그래서 도발적이다. 열여섯 살 소녀를 화자로 삼아 성적인 뉘앙스, 심지어 마조히즘적인 욕망의 단편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이 적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이 곡의 감수성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렘물’ 등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건 ‘금지된 욕망’을 노래한다는 점이다. 물론 보도 자료에 소개된 “나이를 먹어 보니 나쁜 어른들만큼 나쁜 아이들도 많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란 밴드의 설명은 이 곡의 ‘아청아청’한 수위를 교란하려는 의도를 가지거나 혹은 이 곡을 만든 주체의 무의식적 강박을 드러내는 것 같다. (커버 사진을 보면 전자처럼 여겨진다, 일종의 패러디나 역설 같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요점은 대상화, 타자화가 ‘저들’이 가진 욕망을 단순화하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작동한다는 점이니까.


외국인 노동자나 조선족 노동자들에겐 고향에 있는 가족의 안위가 절대적일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폭력을 쓰거나 절도를 쉽게 저지를 것이다. 성매매종사자들은 언제나 폭력의 피착취자이며 낮은 자존감과 깊은 수치심 속에 살아갈 것이다. 폐지를 모아다 파는 노파는 사실 강남에 빌딩을 가진 부자일 지도 모른다. 담배 피우는 날라리 고등학생은 통제불능의 문제아일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다. 열여섯 살 소녀에게 성적 욕망과 판타지라니, 있어선 안 될 일이다. 반면 열 여섯 소년이란, 리비도에 지배당하는 동물에 가까울 것이다, 등등…


이 모든 ‘편견의 가정법’이 나쁜 이유는 그들에게 존재하는 나름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욕망‘들’을 삭제한다는 데 있다. 소설 <로리타>나 영화 <언 에듀케이션>처럼 소녀의 복잡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아침의 “스윗 식스틴”은 , 그렇게 우리 내면의 강박과 편견에 균열을 낸다. 그 욕망이 진짜냐 아니냐, 혹은 누구의 것이냐 같은 건 크게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균열 그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열여섯의 나는 여자가슴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다. 그런 내가 혐오스러워 매일 참회의 일기를 썼다. 키스 한 번 못해보고 늙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내가 불쌍해 매일 위로의 일기를 썼다. 내가 밤새 썼던 길고 시시한 편지를 읽던 단발머리 소녀는 어쩌면 대학생 오빠와, 혹은 동갑내기 여학생과 애절한 연애를 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내게 전화번호를 건 낸 키 큰 소녀는 어쩌면 나와 간절하게 키스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범죄자들은 범죄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다른 욕망’들’의 좌절로 인해 타락한다. 시시한 날라리였던 당구장의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미래에 겁을 먹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진실이 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 요컨대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욕망의 정체나 방향이 아니라 ‘저들’에게도 나와 같은 욕망이 그저 거기 있다는 사실이다. | 2013.07.29



매거진의 이전글 마술적 내러티브와 장소없는 감수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