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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Jul 24. 2017

마술적 내러티브와 장소없는 감수성

f(x) - 첫 사랑니 | 2013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이 노랫말을 들은 건, 내 기억에 초등학생 때였다(네, 늙었습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도입부다. 이상한 얘기지만, 그로부터 나는 사랑은 괴롭고 고단한 것, 그럼에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괴롭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한 데 있었다. 내 연애의 8할은 둘이 서로 즐거운 때에 종말을 상상하는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건 안도감이 아니라 어째서, 이따위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가까웠다.


f(x)의 “첫 사랑니”는 그래서 흥미롭다. 이 노래는 ‘첫 사랑’을 소재로 삼은 노래들 중에 가장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론 보통의 노래들처럼 여기서의 첫 사랑도 아름답지만 가슴 아픈 것이고 그래서 본질적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주술적이고 예언적이다. 인도 악기인 시타르의 음색을 주도적으로 쓰는 가운데 북유럽의 캐롤 멜로디까지 끌어안는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특정 장르나 지역색을 드러내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흔히 ‘마술적’이라고 부르는 무드를 형성하기 위해 애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볼 때는 무엇보다 노랫말 때문이다.


안녕 한 번쯤은 날 들어 봤겠지 너의 사랑니 (Ah-)
이미 어릴 때 모두 겪었다 생각하겠지 (Ah-)

Attention boys 나는 좀 다를 걸 다른 애들을 다 밀어내고 자리를 잡지
맘 속 깊은 곳에 (Pa Rum Pum Pum Pum) 아주 은밀하게 (Pa Rum Pum Pum Pum)
네 맘 벽을 뚫고 자라난다 (네 맘 벽을 뚫고 자라난다)
특별한 경험 Rum Pum Pum Pum (특별한 경험 Rum Pum Pum Pum)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새로운 경험 Rum Pum Pum Pum

아야! 머리가 아플 걸 잠도 오지 않을 걸
넌 쉽게 날 잊지 못할 걸 어느 날 깜짝 나타난
진짜 네 첫사랑 (Rum Pum Pum Pum)

이거 어쩌나 곧게 자란 아일 기대했겠지 (Ah-)
삐딱하게 서서 널 괴롭히겠지 내가 좀 쉽진 않지 (Ah-)
이렇더라 저렇다 말들만 많지만 겪어보기 전엔 알 수가 없겠지
힘들게 날 뽑아낸다고 한대도 평생 그 자릴 비워두겠지 (아마 난 아닐 걸)
Yeah 아마 맞을 걸 이젠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줄게 쉿! 둘만의 쉬잇!

진짜 네 첫사랑 특별한 경험 Rum Pum Pum Pum
짜릿한 첫사랑 새로운 경험 Rum Pum Pum Pum
진짜 네 첫사랑 특별한 경험 Rum Pum Pum Pum
짜릿한 첫사랑 새로운 경험 Rum Pum Pum Pum


이 노래의 주체는 둘이다. 하나는 스무 살 즈음에 이미 단단해진 잇몸을 새로 뚫고 자라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새로운 경험’으로서의 첫 사랑니. (새삼 ‘사랑니’란 단어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 고통의 감각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을 같은 선에 놓으며 첫 경험의 두려움(뭐지 이 아픔은?)과 설렘(이제 어른이 되는 건가!)을 적절히 묘사한다. 다른 하나는 무서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어느 여자애의 자의식이다. “Attention boys, 나는 좀 다를 걸, 다른 애들을 다 밀어내고 자리를 잡지”라고 통보하는 소녀는 남자애들(혹은 여자애들)을 꼼짝 못하게 잡아두고 그'들'에게 첫 사랑의 자리를 꿰찰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자신만만한, 좀 식상하지만 ‘마녀’의 이미지마저 빌려오는 이 선언은,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일단 소년/소녀의 관심을 잡아두는 데 온 힘을 다한다. 따라서 이 곡에서의 ‘첫 사랑’은 오직 노래하는 소녀의 것이다(대상은 그저 대상일 뿐이다). 이때 중요한 건 사랑니와 소녀, 두 주체의 관계가 개별적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내게 “첫 사랑니”는 사랑니가 자라는 고통을 경험한 소녀의 성장담이 아니라 사랑니와 소녀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 즉 각각 다른 대상(사랑니는 소녀에게, 소녀는 대상에게)을 겨냥하는 두 개의 화자가 애매하게 겹쳐지는 마술적 내러티브의 재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노래로 들리기 때문이다.


노랫말과 선율이 힘을 합쳐 (어떤 이야기가 아닌) 분위기를 지향하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세계관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싱어송라이터(요컨대 ‘작가’)의 ‘작품’이 아닌, 시장과 산업의 맥락에서 구성되는 대중음악(POP)의 정체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2010년을 전후로 국제화된 SM 엔터테인먼트의 결과물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특징일 것이다(샤이니의 “링딩동”이나 소녀시대의 “I Got A Boy”, EXO의 “으르렁”을 예로 들고 싶다). 결과적으로 첫 사랑을 다루는 이 곡이 굳이 시타르의 음색을 비롯한 여러 이국적인 요소들을 조합하며 고만고만한 아이돌 팝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맥락에는, 내러티브보다는 분위기나 스타일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소위 ‘무국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SM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적 지향이 작동한다. 201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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