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 - 비포 선라이즈 | 2013
1995년, 극장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봤을 때 나는 대학 2학년이었다. 종로의 코아아트홀이었는지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그때 내가 영화를 보러 가던 곳은 그 두 곳뿐이었으니까). 이 영화는 정말 많은 걸 자극했다. 유럽 배낭여행, 낯선 만남, 한밤의 공원, 아아 그래, 막 떠나는 기차의 묵직한 소리 같은 것. 또한 과연 저 만남은 운명일까, 둘은 하룻밤 동안 얼마나 많은 걸 공유했을까, 저것은 사랑인가, 나중에 다시 만났을까, 내게도 저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등등. 그리고 2004년 [비포 선셋]이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아 그래, 10년 전 그 둘을 이어줬던 건 호감을 가진 낯선 상대와 나누던 미묘한 성적 긴장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 둘이 그때 그 밤에 서로 몸을 나눴다면 그 인연은 더 간절했을까 시시했을까.
그 밤 일은 자꾸 생각하지 말아요, 생각하면 자꾸 그 생각이 커져요
그 밤 일은 자꾸 생각하지 말아요, 그럴수록 쓸쓸해져요
우린 취했고 그 밤은 참 길었죠, 나쁜 마음은 조금도 없었죠
실끝 하나로 커다란 외툴 풀어내듯, 자연스러웠던 걸 우린 알고 있어요
그 밤 일은 자꾸 생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다시 만날 수도 없잖아요
그 밤 일은 자꾸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럴수록 더 슬퍼져요
우린 어렸고 무엇도 잘 몰랐죠 서로 미래를 점칠 수 없었죠
오랜 뒤에도 이렇게 간절할 거라곤 그땐 둘 중 누구도 정녕 알지 못했죠
비슷한 듯 다른 경험을 가진 세대가 공유하는 ‘마음의 장소’
이적의 “비포 선라이즈”는 그에 대한 대답인 것 같다. 이 노랫말의 수위가 아슬아슬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유치한 건 아니다. 성인이라면 언제든 마주할 수도 있는 상황일 텐데, 가슴을 치는 건 우아하고 애틋한 멜로디뿐 아니라 노랫말이 둘 사이에 뭔가 벌어진 다음의 고민이나 상념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 밤에 우리는 모두 취했지만 그저 술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 하여 그 모든 일들이 자연스러웠고, 그럼에도 두 사람은 맺어지지 못했고, 그래서 그때 그 밤의 일은 다시 오지 못할 일이 되었다는 것. 이 안타까움과 후회, 어쩌면 미련 같은 게 뒤섞인 감정의 격랑을 묘사하는 게 “비포 선라이즈”란 노래다. 어쩌면 둘은 우연히 마주쳐 다시 추억에 젖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에도 중요한 건 그 다음일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그 다음이다. 사실 모든 관계가 그렇지 않던가. 남녀든 동성이든 섹스 자체보다 그 이후의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는 늘 노력으로 유지된다. 그러므로 뭔가 벌어졌다면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정돈되도록 애써야 한다. 소위 어른의 태도는 그런 것이다. 이런 상념들을 자연스레 떠올린다는 점에서 “비포 선라이즈”는 말 그대로 ‘본격 성인가요’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 곡 자체보다, 이적이라는 가수가 이런 노래를 만들었다는 게 더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이적은 최근 [무한도전]이나 [방송의 적] 같은 프로그램에서 공공연히 유희열에 대한 경쟁의식을 드러내곤 했는데, 그게 음악이 아닌 ‘섹드립’에 대한 것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요컨대 ‘누가 더 변태인지’ 겨루는 구도는 (적어도 내게) 저 둘에 대한 호감을 살짝 더 상승시켰는데, 이적이 아예 이런 노래를 만들어버렸으므로 그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생각도 든다. 한편 이 노래의 등장에는 최근 한국 대중문화의 경향이라 해도 좋을, 과감한 시도들이 영향을 줬다고도 본다. 방송에서는 진즉에 그 분야를 개척한 신동엽과 그 바통을 이어받은 [SNL 코리아]나 [마녀사냥]이 있고, 음악에서는 10센치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나 장미여관의 “봉숙이” 같은 곡이 있었다. 여기에 트위터처럼 짧게 치고 빠지는 데 최적화된 SNS가 ‘섹드립’ 유행에 기름을 끼얹었다고 보는데, 이 모든 상황이 “비포 선라이즈”의 아슬아슬한 수위를 오히려 부담 없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이적이라는 음악가 개인의 실험인 동시에 상황적으로도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이에 대해 좀 더 쓸데없이 진지하게 접근하면, 1975년 전후에 태어난 ‘신세대’의 문화적 경험과 2013년 현재 한국 사회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조응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 40대인 이적의 노래가 20대인 ‘피카츄 세대'(이렇게 불러도 되지 않을까)와 공명하는 지점, 요컨대 ‘세기말’과 ‘신세기’에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낸 세대가 각각 점유하는 어떤 감각의 차이, 그리고 그 둘이 공유하는 ‘마음의 장소’가 있지 않을까? 물론 무언가 핵심이 빠지지 않은, 거의 실제에 가까운 ‘어른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동시적으로 등장하는 시대라는 게 일단은 반갑다. | 2013.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