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이슈코리아 69호 | 2013.10
그날을 기억한다. 나는 막 ‘국민학교’에 입학한 때였고 거기는 삼척의 관광지 죽서루, 주말이면 사람들이 북적이던 명소였다.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주말 나들이를 가곤 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아버지는 그때마다 가족들을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작은 카메라의 필름을 갈아끼우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내 손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쥐어주었다.
그 감촉과 구도를 기억한다. 죽서루를 배경으로 아버지가 자세를 잡고, 나는 세로로 긴 프레임에 눈을 갖다 대고선, 잔뜩 긴장한 채로 언제 셔터를 눌러야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보고 배운 대로 “하나! 둘! 셋!”이라고 외쳤지만 단번에 셔터를 누르진 못했다. 어머니가 옆에서 ‘천천히 하라’며 응원했던 것 같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 앞에 양 손을 허리에 대고 위풍당당 서 있던 아버지를 향해 나는, 팔딱대는 심장의 스위치를 끄듯 카메라의 셔터를 꾹 눌렀다. 내 생애 첫 번째, 찰칵.
일주일 즈음 후에 현상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내 생애 첫 사진은 선명하게 잘 나왔지만 아버지의 발목 부근에서 프레임이 잘려버렸다. 당신의 위엄 있는 포즈는 순간 몽당연필 같았다. 어색하고 우스웠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한참 웃었다. 그 뒤로 나는 나이를 먹고 카메라도 전자식 자동카메라로 바뀌었지만 오래된 앨범을 꺼낼 때마다 우리는 죽서루의 그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한때 ‘국민 카메라’로 불리던 저 올림푸스 pen ee-3는 부드러운 헝겊에 쌓여 장롱 속에 깊이 묻히고 말았다. 이걸 다시 꺼낸 건 2006년이 되어서다. 유행처럼 필름 카메라 붐이 다시 오고, 마침 이런저런 여유가 생기기도 해서 장롱에서 오래된 카메라를 꺼내 수리점에 맡겼다. 그땐 꽤 무겁고 큰 카메라 같았는데 막상 손에 쥐어보니 아담하니 작았다.
요즘도 이 카메라로 사진을 종종 찍는다. 이것 외에도 필름 카메라가 몇 개 더 있고, 여행갈 때는 주로 그것들을 챙기지만 이 카메라만큼은 어떻게 정리하지 못하겠다. 볼 때마다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의 공기라든가 햇살 같은 게 떠오른다. 나는 볼이 빨갛고 통통한 여덟 살짜리였다. 둘째는 자기도 사진을 찍겠다고 떼를 썼고 막 걸음마를 뗀 막내는 어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아담한 키에 날씬한 미인이던 어머니는 외출 때마다 즐겨 입던 호피 무늬 원피스를 입고 내 곁에 서 있었다. 잘 다린 양장 바지에 셔츠를 입고 갈색 선글라스로 멋을 낸 아버지가 허리에 딱 양 손을 짚고선, “자, 찍어라!”하고 소리쳤다. 생각해보니 그때 부모님들의 나이는 아버지가 서른여섯, 어머니가 스물아홉이었다. 나는 이제 서른아홉이다.
이 아담하고 묵직한 카메라를 만질 때마다 그때가 우리 가족의 제일 좋은 때였나, 생각한다. 다음 해 가족은 동해로 이사했고 그 다음 해에는 인천으로 이사했다. 결혼 후 10년 내내 부산에서 거제로, 거제에서 마산으로, 마산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동해로 떠돌던 부모님은 비로소 인천에 터를 닦았지만 늘 서울에 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여름이면 섬으로 피서를 갔고 그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가족사진은 대략 1991년까지 찍었다. 그때가 제일 좋은 때였나. 모르겠다. 나쁜 일이 더 많았을까. 모르겠다. 아버지가 우리를 떠난 그날 이래, 나는 당신과 연락하지 않은 채로 10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카메라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걸로 처음 사진을 찍었을 때 아버지 당신, 그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만 나는, 언젠가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걸 멈추고 아버지와 직접 얘기해야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