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코리아 매거진 | 2008.11
오래 전 <W 코리아 매거진>에 쓴 글. 그때는 패션지, 특히 <더블유 코리아>에서는 재미난 기획을 많이 했다. 엉뚱하고 기발했다. 잘 차려입고 찾아간 레스토랑 앞에서 웨이팅하는데 돌연 나를 향해 웃긴 표정을 짓는 애인 같달까. 그래서 그 잡지를 사랑했다.
이 글은 CCTV에 대한 논픽션과 픽션을 엮은 기획에 포함되었다. 그 중 픽션 파트에 참여했는데 코미디, 로맨스, 에로로 나눠졌다. 소설가 서진과 <막돼먹은 영애씨>의 한설희 작가가 코미디와 로맨스를 한 편씩 맡았는데 나는 에로버전을 썼다. 당연히, 야하다. ㅋㅋㅋ *후방주의*
그 놈은 먼저 은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녀석은 혀로 그녀를 핥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든 은지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입은 살짝 열려있다. 모니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에 설치된 CCTV는 아무 소리도 잡아내지 못한다. 심지어 거리도 멀다. 흐릿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는 괴로운 것인지 쾌감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마침내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양 다리로 은지를 꼭 끌어안았다. 모니터를 지켜보던 은호의 눈이 움찔한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다. 깍지 낀 양손은 초조한 듯 턱을 괸다. 은지의 어깨가 들썩인다. 놈은 은지의 엉덩이를 꼭 감싼다. 은지가 몸을 비튼다. 은호는 그게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인지 교태를 부리는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만 그는 곧 벌어질 어떤 일을 예견하는 저 근육의 팽팽한 긴장을 노려볼 따름이다.
녀석의 허벅지는 단단하고 견고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놈의 품에 안긴 은지는 결국 움직임을 멈춘다. 녀석에게 모든 걸 맡긴 것 같다. 은호의 눈이 떨린다. 자신도 모르게 낮은 숨을 내쉰다. 그러나 은호는 관찰자다. 그는 혼란스럽다. CCTV 렌즈가 건조하게 모니터에 화면을 비춘다. 폐쇄회로의 강박증 같은 침묵이 모니터를 잠식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냉정해야했다. 이 작은 방에 들어올 때부터, 아니 애초에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부터 냉정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은호와 은지는 2년을 같이 살았다. 이름이 비슷해 사람들은 둘이 남매 같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은호의 친구들은 은지를 좋아했다. 은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은지에게는 결국 은호뿐이었다. 은호는 밤마다 자신의 팔을 베고 잠드는 은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것은 평화였고 안식이었다. 서른 살 생일에 운명처럼 찾아온 두려운 행복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와 함께 영원히 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은지는 낯선 놈과 저 방에서 살을 부비고 있다. 은호는 혼란스럽다. 화가 났다.
하지만 거기에는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이 있었다. 이상한 호기심과 뒤틀린 욕망이 섞여 있는 분노였다. 그리고 그건 은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관찰자다. 그의 역할은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뿔테 안경을 낀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해요.” 그 말을 들을 때 은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무기력한 인간의 한 부류임을 깨달았다. “물론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뭐,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익숙해져야죠.” 의사가 말했다. “이건 시스템이니까요.” 다리가 날씬한 여의사는 안경을 쓱, 올리며 말했다.
은호는 생각했다. 인간의 역할이 규정되는 건 결국 시스템에 의해서다. 시스템은 거대하다. 그 곳에서 지금 내게 주어진 역할은 관찰자다. 그것 뿐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 은호의 역할이다. 그가 거기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쓸데없이 진지해진 은호는 조금은 한심한 기분이 되어 낮은 숨을 내쉰다. 그때 모니터에 비친 은지의 동공이 커진다. 마침내 녀석이 은지의 등에 올라타자 본능적으로 은지는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은호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 너무 민감하신데요.”
의사가 은호의 어깨를 톡, 치며 웃었다. “첫 교배라고 하셨죠?” 여의사의 손길은 따뜻하고 상냥했다. 은호가 고개를 돌리자 흰 가운 사이로 여의사의 매끈한 허벅지가 보였다.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애완동물 교배를 CCTV로 보여주는 건 비윤리적이긴 했지만 순종 교배를 원하는 고객들은 그걸 좋아했다. 은호는 그게 좀 바보같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다들 그렇게 한다는 얘기에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은호는 역시 하지 말 걸, 생각했다. 여의사는 여러 복잡한 생각으로 얼굴이 붉어진 은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가볍게, 그러나 부드럽게 두드리며 웃었다.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되요.”
정작 은호는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른 게 2살짜리 페르시안 암고양이 은지 때문인지 날씬하고 매력적인 수의사 때문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은호는 그녀와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차렸다. 가슴 윤곽이 동그랗게 드러난 하얀 블라우스가 은호의 시야를 가렸다. 그녀에게서는 장미향이 은은하게 흘렀다. 은호가 조금은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수의사는 몸을 돌려 모니터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 너머로 동물병원의 폐쇄회로 카메라, 반짝이는 CCTV 렌즈가 빤히 은호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