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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Aug 22. 2017

(음악)비평의 역할과 한계

혹은 내 어깨에 눌러 붙은 거대한 물음표

2010년에 쓴 글이고, 내 책 [청춘의 사운드] 에필로그에 수정해서 실은 글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음악이 세계를 구하거나 바꾸진 못한다. 세계를 구하거나 바꾸는 건 언제나 인간의 진심이었다. 그걸 헷갈리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걸 괄시해서도 안된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의미없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일단은 '음악평론가'가 내 직업이다. 피하거나 숨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그러니까 제대로 잘, 해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본문보다 여기저기서 인용한 글들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비평의 역할과 한계: 혹은 내 어깨에 눌러 붙은 거대한 물음표 


고백하자면 나는 창작을 하고 싶었다. ‘비평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쓰는 글에 어울리는 인트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거의 반드시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는 말로 이해한다. 내게 ‘음악평론가’란 타이틀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나 시인(혹은 둘 다)이 되고 싶었다. 13살 이후로 쭉 그랬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공식적으로 ‘음악평론가’로 불린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할 때도 많다. 처음으로 공식적인 음반리뷰를 썼던 1999년 이후부터 쭉. 그런데 얼마 전 짤막한 자기소개를 써야할 일이 생겼던 나는 다음과 같이 써버렸다. “보통 (대중)음악평론가라고 불리지만 스스로도 그 명칭에 대해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아, 말해버렸다!)


“사이먼 프리스(1996)는 ‘음악학이 관심을 갖는 대중음악은 작곡이나 연주를 원하는 사람들 위한 대중음악이다’라고 주장했다. 텍스트가 청취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관심을 두고 구성된다는 것이다.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내가 그렇듯이) 사람들을 위해, 즉 ‘음악학자’가 ‘비평가’로 변장하고, 비평가가 또한 ‘팬’의 흉내를 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분석이 직관과 과학적 지식 모두에 근거를 두고 반응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 리처드 미들턴 <팝과 록, 그리고 해석>, 2001


내 처지가 이 모양이므로 이 글은 횡설수설, 애매모호할 수도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러 양해를 구할 생각은 없다. 나로서는 애매한 채로, 모호한 채로, 남겨진 것들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에는 별도의 소제목이 없다. 게다가 이런저런 비평서나 인터뷰 모음집, 혹은 연구서의 서문에서 빌려온 저자의 인용문들이 섞여 있다. 그 글에 대해 별도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이 글들은 모두 내가 동의하거나 화두로 삼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비평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라면 나로서는 필연적으로 (음악)비평가로서 내 역할과 한계를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인용들이 그에 대한 일종의 부연설명이 되리라고 본다.  


“우리가 미적 판단의 표현이나 부르는 말은 우리가 한 시대의 문화라 부르는 바에 있어서 매우 복잡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쓰임새를 기술하자면, 혹은 문화화된 취향(cultured taste)이 의미하는 바를 기술하려면 문화를 기술해야 한다. (중략) 전적으로 다른 게임은 다른 시대에 행해진다.” - 비트겐슈타인 <Lectures and Conversations on Aesthetics, Psychology and Religious Belief>, 1967


알다시피, 음악평론은 종종 영화평론과 비교된다. 문학이나 미술 비평이 아니란 게 흥미로운데 일단 이 비교법에는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암묵적인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대중문화 비평이나 순수예술 비평이 무언가 모자란 채로 절룩거린다는 인상을 받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한국에서 음악과 영화는 90년대 이후 질적 성장과 양적 팽창을 이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비평의 영역에선 좀 다르다. 영화비평은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대중저널과 상호보완적으로 담론을 발전시켜온 반면, 대중음악비평은 저널에서 저널로 이동하다가 담론을 만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잡지 뒷부분 어디쯤에 몇 줄, ‘이 달의 추천 앨범’ 같은 텍스트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추천 앨범 코너는 앨범 배급사/제작사와 저널의 상관관계에 의해 정의될 때가 많으니 현재 우리가 대중음악비평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이 벌어지는 공적인 공간은 무척 드물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저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시론들, 그러니까 “2PM 박재범 사태를 어떻게 볼까”라든가 “걸 그룹 트렌드, 이유가 뭔가”같은 글들은 빼자. 이런 주제에 대해 음악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고 그래서 이걸 ‘음악평론’이라고 부르기 모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주제들은 사회학적인 관점을 요구한다. 물론 대중음악 비평이라고 음악 자체에 대해서만 말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대중음악은 이게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사회학적인 관점이 중요하게 작동해야하고 그게 효과적일 때 대중음악 비평이 비로소 비평적인 힘을 얻는다고 믿지만, 많은 경우 일반적인 대중음악 비평이 ‘음악’보다 ‘대중’에 방점이 찍힌다는 걸 상기할 필요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음악평론가는 종종 사회학자나 역사학자, 혹은 무려 철학자의 역할을 떠맡는다. 


“록에 대한 글을 남긴 많은 저술가들과 달리 나는 록 노래의 가사는 분석하지 않는다. 나의 강조는 음악에 있지 음악의 일부인 노래로 불려지는 텍스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가사를 인용하기보다는 록 음악가들의 인터뷰와, 이보다 빈도는 덜하지만 록 비평에서 인용할 것이다. 록을 음악 예술로 취급하면서 만약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 테어도어 그래칙 <록 음악의 미학>, 2002


“1990년대 초, 어쩌다가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을 때조차도 나는 음악산업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듣는 음악들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 밖의 산업적 컨텍스트들은 내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신현준 <글로벌, 로컬, 한국의 음악산업>, 2002


그러나 대중음악 비평은, 영화비평과 마찬가지로, 어쨌든 전적으로 음악 자체에 대해서 말해야한다. 그게 기본이다. 관건은 음악적 해석을 어떻게 사회학적인 관점과 유기적으로, 세련되게 결합시키느냐는 것인데, 그때야말로 음반 리뷰는 한 편의 예리한 대중문화 비평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지금 한국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음악비평가가 드물다는 점이다. (이걸 음악비평가라면 음악창작/연주 등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전혀 다른 얘기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읽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은 다른 영역과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게 애매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이를테면 비평의 대상으로 무엇을 정하느냐는 것이 주요한 화제기도 했다. 음악비평에서 레코딩이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저장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말하는 ‘음악 그 자체’란 바로 이 레코딩/레코드에 대한 것이다. 21세기적으로 말하자면 디지털레코딩/mp3음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와 독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음악비평을 음악을 둘러싼 컨텍스트에 대한 재해석으로 오해한다. 대중적인 저널의 에디터들이 음악평론가에게 ‘현상’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비평가가 어떤 앨범에 대해 수사학적인 찬사만 늘어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은 1990년대에 한때 유행했던 ‘록의 진정성’의 계보를 만들려는 의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즉 ‘한국 팝의 고고학’은 ‘한국 록의 계보학’과는 다르고 신화학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과 무관하게 신화를 덧입히는 작업이 아니라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신화들을 재조명하는 작업, 달리 말한다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덮어둔 채 미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드러내고 감별하는 작업이었다.” -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2005


나는 이런 오해야말로 지금 한국 대중음악비평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다른 문제들도 많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엔 시간도, 지면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어쨌든 지금 ‘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한계’가 뭐냐고 묻는다면 당장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비평하는 사람들도, 비평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음악비평’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대중음악 비평은 일단 ‘대중음악 비평’을 정의하는 작업으로부터 대안을 찾아야할 것 같다. 물론 이런 작업이 전무한 건 아니다. 몇 년 전에 설립된 한국대중음악학회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담론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대중음악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저널들, 이를테면 [weiv]나 <가슴>, <보다>와 <IZM> 같은 웹진의 구성원들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비평가들도 각자, 혹은 집단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오고 있다. 그에 대한 관점은 다르지만 실천의 방식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런 과정 자체가 대안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한계적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상호관계가 거의 전무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35년 넘게 당대의 뮤지션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는 <재즈북>의 여러 개정판에 매달렸다. 예를 들어 쿨 재즈, 하드 밥, 프리 재즈가 급부상했을 때 나는 이런 새로운 스타일과 연주 방식의 영향을 받으며 글을 썼다. 비평가가 음악과 함께 살아가야 재즈 비평이 살아있는 것이 된다.” - 요하임 E. 베렌트 <재즈북>, 2004/1989


내가 생각할 때 지금의 대중음악 비평에는 긴장이 필요하다. 연구자와 비평가의 긴장, 비평가와 비평가의 긴장, 저널과 저널의 긴장, 독자와 비평가 혹은 비평가 자신의 내부적인 긴장 말이다. 이런 긴장감 위에서 담론이 형성되고 그때 비평은 대중적 지지든 반론이든 어떤 식의 리액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21세기적인 현상들, 웹 환경의 발전과 블로그의 등장을 고무적으로 여긴다.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이, 비평이란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다. 나는 비평의 근거가 동시대성에 있다고 믿는다. 동시대성이란 지금 바로 여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걸 제대로, 적확하게 있는 그대로 또한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라고 본다. 내 기준에서 좋은 비평가와 그렇지 않은 비평가의 기준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나는 내가 그런 비평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앨범에 순위를 매기는 작업은 단지 매체의 상업적인 기획을 넘어서서 대중음악사 기술 측면에서 보면 ‘평가를 통한 기록’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대평가’라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경험과 전통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고, 아직까지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 평론이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적이 없다. 한국에서 그간 ‘명반 선정 작업’이 드물었다면 그건 대중음악에 대한 ‘비평문화’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음악 산업이 정상적으로 발전한 나라들은 음악전문매체와 비평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음을 상기한다면, 한국의 대중음악은 산업화 전 단계에 있다.” - 박준흠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008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음악평론가로서 애매한 정체성을 가진 나로서는, 내가 어떤 작품에 대해 쓴 리뷰가 오해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엔 비평이란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고 봤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요즘 나는 답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게 정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볼 수 있는 게 단면뿐이란 생각 때문이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많은 경우, 혹은 거의 모든 경우 우리는 어떤 작품, 혹은 결과물로부터 세계의 단면만을 볼 수밖에 없다. 비평가라고 투시경을 가진 건 아니니 막막하긴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오해와 단면이 무척 중요하다. 비평이란 결국 단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전체를 더듬거리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비평가란 더듬거리는데 익숙한/훈련된 감각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모두 장님이고 비평(가)의 본질적인 한계는 바로 그 막막함에 있다. 이걸 어떻게 없애야할 지는 모르겠다. 사실은 딱히 없애야할 필요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이 글들이 단지 인터뷰의 기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길고 긴 대화를 통해 구성한 감독론이며, 오늘의 한국 영화에 대한 연애편지(라고 믿는)다.” - 이동진 <부메랑 인터뷰>, 2009


내가 생각할 때, 창작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듬거리게 만드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비평가가 더듬거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난감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잘 더듬거리기 위해 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 입장에서 좋은 비평이란, 이를테면 비평의 역할에 충실한 태도란,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보통 비평가에게 답을 요구한다. 이게 좋은 것인지, 저걸 사야하는지에 대한 답 말이다. 그건 쉽다. 세계를 두 개로 나눈 다음 자신은 이쪽에, 대상은 저쪽에 놓은 다음 그것을 가리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틀스의 모노/스테레오 박스세트는 대단한 것이니 품절되기 전에 얼른 사라고 말하는 게 도대체 비평적으로 무슨 의미이며 아이돌 가수의 트로트 풍 댄스음악(이른바 뽕 댄스)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심지어 이 일련의 사례에 대한 대중적인 반응을 보면서 비틀스 박스세트를 사는 사람과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사람을 구분짓는 게 과연 정당하거나 의미 있는 일인지 나로서는 궁금할 때가 많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답을 내리는 것보다 어려운 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사실 나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보아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러므로 나로서는 내가 접하는 책들에 대해 비록 내가 그것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책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이 새로운 표시체계의 목적은 몇몇 비평가들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환상과는 달리, 책들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지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요 우리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 이루어지는 장도 아니며, 오히려 갖가지 추억의 조각들이 집요하게 들러붙는 어떤 모호한 공간이요, 그것의 가치(창조적 가치도 포함하여) 또한 그곳을 배회하고 있는 불분명한 유령들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키는데 있다.” -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2008


게다가 질문을 던지는 건,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대중음악은 그게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지독하게 사회적이며 모순적이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혹은 그 후로도 컨텍스트가 끊임없이 개입한다. 대중음악이야말로 산업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장르다. 산업과 밀접하기 때문에 대중음악은 예술이면서도 예술이 아닐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대중음악의 영토에서는 ‘예술’이란 용어의 개념 자체가 무용해진다. (팝이나 록, 혹은 가요에 대해 예술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대중문화를 예술의 하위개념으로 여기게 해서 결과적으로 고급/저급, 예술/비예술, 가치있는 것/가치없는 것의 이분법이 은밀하게 작동하도록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음악은 이런저런 개념들에 대한 가장 시끌벅적한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다음 두 개의 명제를 늘 붙들고 있다. ‘예술에 열광하는 것은 비평가와는 무관하다. 그의 손안에서 예술작품은 정신들의 투쟁 속에서 번뜩이는 칼이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료>) ‘사람들은 비평이란 말을 들으면, 바로 판단이나 이성이나 냉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애정이라든가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고바야시 히데오 <비평에 대해서>) 이 두 명제를 모두 존중한다. 가능하다면 그 둘 모두를 내 글이 감당했으면 좋겠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008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게 명확할 리 없다. 상황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고 보는 위치와 관점에 따라 맥락은 바뀐다. 그래서 내게 대중음악 비평이란 마침내 이런저런 자기모순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중요한 건 차라리 비평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계를 구분하고 취향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자기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세계의 복잡함 속에 자신을 우겨넣는 것, 그로부터 세계의 한쪽을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비평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지적 실천일지 모른다. 결국 내가 지겹도록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건 그걸 위해서다. 내게 현상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제대로 더듬거리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애초에 나의 정체성 자체가 모호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채였으므로 별 수 없다. 내가 어깨에 지고 있는 것은 거대한 물음표다. 


“미국의 록 비평가들은 신화학자들이다. 그들은 음악에서 상징적 중요성을 찾으려 하는데, 이들의 상징은 대개 미국 문화 전반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이들의 록 비평은 미국 문화 비평으로서 쓰이고 (그리고 읽히고) 있다. 이에 비해 영국의 록 비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팝 팬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로 아직도 이들은 컬트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의 글은 기본적으로 자료적인 가치(아마도 미국 대중음악의 가장 열광적인 수집가는 영국인일 것이다) 혹은 연대감의 표시를 중시한다. 영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의 젊은 독자들의 욕구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평적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도 여전히 개념 규정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록의 사회학은 그 연구 대상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질문은-내가 아직까지 회피한 것인데- 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 사이먼 프리스 <록 음악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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