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강좌 야외수업 장소가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정해졌다. 수업 전날까지 비가 많이 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야외수업하기 딱 좋은 흐린 날씨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지하철을 이용해서 수원역으로 향했다. 수원역에서 버스로 환승하여 약속 장소인 화성행궁으로 갔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에서 융릉으로 옮기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원화성을 쌓고 화성행궁을 지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입장은 처음이다. 정조는 55세에 왕위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그러나 정조는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낙남헌(洛南軒)을 제외한 시설이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에 따라 철거되었다. 일제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병원과 군청과 경찰서, 소학교 건물을 지었다.
정문인 신풍루(新豊樓)로 들어섰다. 신풍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뜻이다. 수원화성 복원 사업 때문에 광교로 옮겨간 초등학교 이름도 신풍이다. 2007년까지 행궁 객사인 우화관(于華觀) 건물 터를 교장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좌익문(左翊門)과 중약문(中陽門)을 지나니 봉수당(奉壽堂)이 보인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잔칫상은 봉수당의 정중앙에 차려졌다. 12가지 소별미와 70여 가지의 다양한 음식이 진설되었다. 가이드가 말하길 현재 시가로 7~8천만 원이 든 음식상이라고 한다.
영화 ‘사도’에서 정조는 잔칫상에 앉아있는 혜경궁 홍씨 앞에서 부채춤을 춘다. 부채에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태몽을 꾸고 그린 천룡이 그려져 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 속에 뒤주에 갇혀 죽는다.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영조는 어렵게 왕이 됐다. 죽을 수도 있었던 혹독한 왕위 계승의 과정을 거쳐서인지 아들을 혹독하게 훈육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공부와 옷차림 등의 예법을 강요했다. 그래야 기회가 생기면 왕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인 신하를 거느리고 나라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공부와 예법보다는 노는 것이 좋은 아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눈밖에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능이 모자라면 참고 버티는 인내심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부족했다. 아들이 원한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이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조선 최고의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조는 아들을 죽인 왕이 되었고 사도는 아버지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의 첨예한 갈등이 낳은 비극은 문득 내가 아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내 조언이나 꾸지람이 의미 없는 꼰대의 잔소리로 그치거나 관계악화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키우다 보니 영조의 입장을 일면 공감한다. 공부하지 않고 성적이 안 나오면 속이 상한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새벽까지 안 자고, 항상 유튜브를 끼고 살고, 책과 옷이 방바닥에 널려 있는 것을 볼 때 화가 난다. 나 역시 청소년 시절 모범적인 생활만은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세상이 어떤데 하고 걱정이 된다.
다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떠들지만, 사회는 공부를 잘하면 보다 많은 기회를 준다. 또한 좋은 습관과 태도는 무엇보다도 큰 경쟁력이 된다. 다만 아들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영조의 자기중심적 접근 방식은 화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되새김질할 만하다. 두 마디 할 거 한 마디로 줄이고 화를 누르고 참는 것이 필요하다.
다행히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기준을 넘는 비범함을 타고났다. 그리고 노력한다. 그리고 치밀했다. 자신의 요새를 만들기 위해 수원화성을 짓는다. 공식적인 명분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다. 사도세자를 조선 최고 명당인 융릉으로 모시고 주변에 민가와 관청을 옮길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곳이 현재 팔달산 아래 수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는 노론 세력이 강한 한양(서울)을 벗어나 개혁을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반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원화성을 짓고 강력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 외영을 설치하였다.
화성행궁을 나와 서쪽으로 올라가면 143m 높이의 팔달산이다. 성곽과 누각이 보인다. 수원화성이다. 누각은 군사지휘소인 서장대이다. 수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수원 월드컵 경기장이 보인다.
성곽 둘레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성곽은 획일적이지 않고 팔달산 지형을 따라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포를 설치했던 서포루(砲樓)를 지나니 서쪽 출입문인 화서문이다. 성안을 나와 성벽을 보았다. 서북 공심돈이다. 공심돈(空心墩)은 성벽 밖으로 돌출되어 적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도 할 수 있는 속이 빈 망루(望樓)다. 수원화성만의 독창적인 시설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은 아래에서 커다란 돌로 쌓았다. 누각이 있는 부분의 성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돌을 다듬고 벽돌을 쌓는 석공의 땀과 숨결이 느껴진다. 성돌과 벽돌을 정교하게 쌓았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세월이 흘러 바래진 성돌과 벽돌이 이제는 자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북쪽 입구는 장안문(長安門)이다. 정조가 서울에서 수원화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장안문 누각은 2층이다. 웅장하고 성벽과 잘 어울린다. 성문 앞에는 옹성이 쌓여 있다. 옹성(甕城)은 성문 밖을 둘러싼 반원형의 성벽으로, 적으로부터 성문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장안문을 보니 1시. 점심시간이다. 근처 유명 식당인 ‘연포 갈비’로 갔다. 모두 갈비탕을 먹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에 이주한 농민들에게 소를 빌려주거나 나누어 주었다. 이후 소 사육과 우시장을 발전하였다. 수원은 소갈비 재료 공급이 원활했고 관련 요리가 발전하였다. 그리고 갈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본 동북각루(東北角樓)와 용연(龍淵)은 화룡정점이었다. 동북각루는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고 불린다. 누각은 ‘ㄴ’ 자모양의 지붕이 독특하다. 보는 위치에 따라 지붕의 모습이 달라진다. 기존 기와지붕과 달리 입체적이고 창의적이다. 동북각루 아래쪽의 북암문(北暗門)으로 나가면 용연이 있다. 연못이 있고 버드나무와 바위, 성벽이 어우러져 있다.
수원화성에서 여러 변수를 고려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실행한 정조의 전략가 다운 면모를 들여다본다. 단지 한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었던 르네상스형 천재를 발견한다.
만약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처럼 장수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비록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영조의 결정은 비극적이었으나, 사도세자가 아닌 정조가 왕이 된 것은 조선으로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영조의 결정은 단순한 ‘아버지’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고뇌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비극적 역사의 무게를 품고, 용연의 고요한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고 발걸음을 돌렸다.